박찬민 인하대스포츠과학과교수

며칠 전 오랜만에 스포츠 동호회에 참석하려고 관련 운동 장비를 준비했다. 운동복을 챙겨 입고 거울을 보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 하필이면 요즘 같은 시국에 일본 스포츠 브랜드 제품을 입었네', '다른 동호회 참석자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저런 생각에 갑자기 신경이 곤두서고 스트레스가 확 올라왔다. 결국 다른 외국 브랜드의 옷으로 갈아입고서야 당당하고 떳떳한 마음으로 스포츠 동호회 활동을 즐겼다.
누구도 나에게 대놓고 핀잔을 하지 않겠지만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트레이닝 복조차 눈치보고 입어야 하는 현실이 착잡하기만 하다. 마음 한편으로는 '왜 우리나라는 일본도 몇몇 개나 가지고 있는 세계적 수준의 스포츠 브랜드 하나 없는 걸까.' 스포츠 브랜드는 차치하고, 제대로 된 스포츠 유산은 있는지 의심도 든다.

보통 우리는 조상이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유산(遺産)이라 부른다. 스포츠 유산에 대해 연구하는 Navrud와 Ready는 "스포츠 유산은 역사적, 과학적, 예술적, 민족적, 인류학적 관점의 가치를 지닌 인공적 산물로서 이용가치뿐만 아니라 비(非)이용가치 역시 매우 큰 공공의 재산이자 과거로부터 사람과 함께 기억되며 후대에 계승되고, 전승될 만한 가치를 지닌 이전 시대의 모든 문화적 산물"이라 정의한다. 돌아가신 손기정 옹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며 금메달을 따고도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이던 그 시절의 사진 한 장이 주는 '마음 속 뭉클함'도 과거의 일제 식민지 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해주는 스포츠 유산 중의 하나다.

최근 우리나라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비롯하여 2011년 대구 세계육상대회, 2019년 광주 세계수영대회 등 다수의 국제 메가 스포츠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유치했다. 아울러 1988년 서울(하계)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포함해, 이른바 '스포츠 5대 이벤트'라 불리는 대회들을 모두 개최했다. 2002년 월드컵은 두 나라가 공동개최한 최초의 월드컵이었다. 현재 '스포츠 5대 이벤트'를 전부 개최한 나라는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등 4개국뿐이다.
독일과 일본은 세계적으로 가장 잘 운영되고 있는 국민 생활체육시스템을 스포츠 유산으로 가지고 있는 국가들이고, 다양한 세계적 스포츠 브랜드도 가지고 있는 스포츠 선진국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편 이탈리아와 러시아는 과거 조상들이 물려준 스포츠·관광유산을 잘 보존해 현재에도 국가의 존속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우리는 메가 스포츠 이벤트 유치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고, 성공적 개최까지 잘 이뤄냈다. 어찌보면 여기까지도 만족스러운 결과라 여길지 모른지만 훌륭한 스포츠 유산을 남길 수 있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지나간 경험은 기억하려 부단히 노력해도 어느 순간 희미해지고 잊힌다. 하물며 이런 대단한 스포츠 이벤트를 경험하지 못한 후대에게 근사한 유산으로 물려주려면 당연히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최소한 스포츠 이벤트가 일어났던 역사적인 장소는 기념해야 한다. 과거 스포츠 유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정책들로 인해 이미 귀중한 스포츠 유산인 동대문운동장의 철거 및 태릉사격장의 폐쇄 등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얼마 전 마무리된 세계적 스포츠 이벤트 시설들을 철거한다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려온다.

스포츠를 통해 생성된 유산이 단순히 스포츠 자체만의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화적 유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향후 지속가능한 유·무형적 유산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스포츠 유산 구축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정책적 노력을 기울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