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진 인천도시산업선교회기념관 목사

어렵고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 우리의 '누이'들은 힘든 부모를 돕고 오빠와 남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학교가 아닌 공장에 가야 했다. 실밥과 먼지로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작업장에서 눈을 부비며 일해야 했다. 지금의 사회·경제적 여유는 이런 우리 누이들의 희생과 무관치 않다. "당시 공장에서 일한 아이들처럼 나는 둘째 언니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돈벌러 갔듯이 나도 그렇게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꿈을 갖는다는 것은 언감생심! 내가 돈을 벌어야 남동생이 학교에 갈 수 있었으니까 돈을 벌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죠."
이렇듯 우리 누이들은 학교 대신 공장을 택했다. 그러나 가족을 생각하는 우리 누이들의 애틋한 선택은 현실에서는 가혹했다. 저임금에 기초한 197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체제에 묶여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비인격적 무시를 당하고, 만성적으로 임금을 착취당하면서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소모적 인간으로 살아야 했다. 온몸으로 사회 모순을 견디며 살았다.

이런 우리 누이들의 삶과 저항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 있다.
인천시 동구 만석동 37번지에 위치한 동일방직과 인천시 동구 화수1동 183번지에 위치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기념관'이다.

동일방직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조 여성지부장을 탄생시킨 여성노동운동의 출발지로서 1950년대 지은 의무실, 1960년대 건립한 강당, 여공들이 지내던 기숙사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공장주의 사주를 받는 어용노조의 방해와 공장주를 비호하는 비민주적 국가의 탄압을 피해 피신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2층 건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동일방직 민주노조운동은 1970년대 한국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 됐다. 전체 조합원 1393명 중 88%인 1214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임금 착취와 차별 대우에 항의해 민주노동조합을 세웠다. 1976년 노조는 조합원 매수 등 노조 파괴에 맞서 항의 농성과 파업을 벌이던 조합원 수백명이 경찰의 강제연행에 맨몸으로 저항했다.

결국 여성노동자 124명은 불순분자, 빨갱이라는 누명을 덮어쓰고 직장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이때부터 기독교회관과 명동성당, 노총회관에서의 단식농성 등 해고자들의 기나긴 복직투쟁이 시작됐다. 최근 동일방직 노동운동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다.
한국 현대사의 의미 있는 공간이 여기 인천 동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한적하고 적막한 구도심의 흔한 거리가 되고 말았지만 이곳은 한국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역사 문화의 공간이고 1883년 개항 이후로 근대를 거쳐 해방 이전까지 종속적 산업화의 유산과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현대사의 역사적 공간이다.
나는 이곳에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을 그리고 싶다.

인천 동일방직에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 이르는 700여m의 거리를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로 만들고 싶다. 그 길을 걸으면서 당연시되는 우리 일상의 여유와 평화가, 사실은 어느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음을 잊지 않고 싶다. 현재 우리가 맘껏 누리고 있는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맨몸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을 잊지 않고 싶다. 짧은 거리지만 우리 아이들과 손잡고 걸으면서 '우리가 함께 사는 것'임을, 또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누군가'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할 것을 말하면서 걷고 싶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머리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손과 발 근육에도 기록할 수 있다. 머리의 기억만큼 근육의 기억도 오래간다. 그리고 근육의 기억은 행동을 낳는다.

나는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을 걸으면서 나의 손과 발 근육에 우리의 산 역사를 기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