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수부두, 2010년.

얼음은 귀물(貴物)이었다. 요즘 같은 삼복더위 중에 임금은 신하들에게 빙표(氷票)를 하사해 서빙고에서 얼음을 받아가게 했다. 3,40년 전만 해도 얼음은 여전히 귀한 물건이었다. 동네 어귀에 있는 얼음(어름)집에서 큰톱으로 자른 얼음을 사서 새끼줄에 매달고 녹기 전에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와야 했다. 바늘로 톡 깨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수박화채를 먹으며 복달임을 대신했다.
염천(炎天)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 이즈음, 얼음에 대한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아이들은 그 귀했던 얼음을 빙표 없이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우리들의 '서빙고'는 바로 화수부두였다. 화수부두는 60, 70년대 연평도 조기잡이 배를 비롯해 강화도, 충청도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가득 실은 배들이 드나들던 우리나라 3대 어항이었다. 수협공판장, 어구상점, 구멍가게, 식당, 술집 등이 즐비했다.

부두 한켠에 제빙공장이 있었다. 당시 어선들은 전기냉장시설을 갖추지 못했다. 바다에서 생선을 잡자마자 궤짝에 담은 후 얼음조각을 바로 채워 넣어야 했다. 식량보다 얼음 선적이 우선이었다. 제빙공장에서 만든 얼음 조각들이 나무 파이프관을 통해 출항을 앞둔 어선의 어창에 쏟아졌다. 작은 틈새로 얼음조각들이 떨어지곤 했다. 땅에 떨어진 얼음은 손으로 몇 번 문지르면 깨끗한 얼음이 되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아이스께끼처럼 입으로 빨며 더위를 이겨냈다. 남는 얼음은 주머니에 잔뜩 넣고 동네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제 화수부두는 옛날의 번잡했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몇 년 전 옛 영화를 살려보겠다고 수산물직매장을 열었고 주차장 확보를 위해 부두 쪽의 오랜 건물들을 모조리 철거했다. 그때 화수부두의 '서빙고' 흔적도 완전히 사라졌다. 비릿한 날것의 풍경도 함께 사라졌다.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