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


한 사람의 탄생은 시작부터 이미 수많은 관계들의 집합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탄생과 더불어 여러 이름들을 획득하게 된다. 누구누구의 손자, 누구의 아들, 딸. 크게는 대한민국 국민, 인천시민, 구민. 성장하면서 더 많은 이름들을 얻게 된다. ○○유치원생, 무슨 초등학교 학생, 결혼과 동시에 누구의 아빠, 엄마, 며느리, 남편, 아내 등 많은 이름들이 붙는다.
이 중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이 하나라도 있는 지 생각해 본다.
자신의 이름을 본인이 짓고 태어나는 경우는 없다. 보통은 조부모나 부모가 자식이 살기 바라는 삶의 방향에 맞게 이름을 짓고, 그에 따라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름대로 살게 되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경우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연말 드레스 코드가 있는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모임에 착석한 후 참석한 사람들이 소개됐다.
이쪽은 ○○치과 사모님, ○○국장 사모님, 그리고 저쪽은 ○○ 한의원 사모님. 뭐 그런 식으로 통속과 구태를 넘나들며 소개해 나갔는데 내 차례에선 어떤 말로 소개할 지가 자못 궁금해졌다. 당시 나의 남편은 남는 것이 시간뿐이었던 처지였다.

"이쪽은 요즘 잘 나가는 논술 강사시고요, 우리 아이 친구 엄마에요."
맙소사! 남편에게 업혀 나가는 호칭에서 나에게만 당시 나의 직업을 얹어 소개한 것이다.
속이 보이면서도 코믹한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차별적이지만 나만 제대로 소개했다고 만족했어야 하나? 그 상황은 지금까지 유쾌하지 않은 기억 중 하나로 각인돼 있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우리를 쉽게 직업과 연관지어 자신을 부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자신과 동일시된다. 나의 직업이 곧 내가 된다면 억울하다. 세상에는 꼭 필요하지만 사회적 인식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직업군들이 있다. 그 일이 정말 좋아서, 열정을 바쳐서 하는 것이라면 그 일로 '나'를 드러냄이 합당하거니와 기꺼운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생계를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것인데 그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규정짓는다면 이는 부당하다. 혹여 변기를 청소한다고 변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지 않는가.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는 자본주의적 관계가 사람을 어떻게 규정짓는가를 잘 보여준다. 바틀비는 문서를 그대로 옮겨 적는 단순직 '인간복사기'였다가 구치소에서 사서(死書) 우편물계의 하급직원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에 대해 밝히기를 함구한 바틀비는 그대로 사서와 동일시됐다. 수취인이 이사 가거나 사망해서 반송도 되지 못하는 편지. 그것들은 매년 대량으로 소각된다.

이왕에 이름이 누군가 불러주는 것이라면 이제는 자신이 기꺼워 기쁨으로 행하는 일로, 관심사로 나를 불러주면 좋겠다. 지인들을 잘 관찰해서 그들의 본성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불러주도록 하자.
그런 의미에서 인디언식 이름은 꽤나 흥미롭다. '씨앗 뿌리는 사람', '거침없는 바람', '들판의 큰 나무' ,'곰의 심장' 등. 누군가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의 이름은 '고통을 지고 가는 사람'이다. 인디언식 친구의 의미라는 이름이다. 직업이나 능력 있는 누군가의 이름에 빌붙어 살아가는 삶보다 나를 잘 드러내는 이름으로 사는 생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