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우주 인천 연수구 송도동 주민


요즘 나는 공기의 질이 나쁘지 않으면 하루에 두어 시간을 아파트 정원에서 보낸다. 아침에는 가볍게, 오후에는 아이와 함께 정원을 누빈다. 보드라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릴 때의 정원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싱그러운 초록의 생기가 오감을 타고 고스란히 몸속으로 전달되는 느낌이다. 머릿속 복잡한 상념들이 말갛게 씻겨 나가며 하루를 살아낼 에너지를 충전한다.

봄꽃이 진 자리에 초록만 무성하더니 이내 여름꽃들이 바톤을 이어 받았다. 귀퉁이에 수줍게 핀 보라색 붓꽃과 돌담 너머로 얌전하게 고개를 내민 노란 장미는 어찌나 정성껏 단장을 하고 있는지, 걸음을 멈추고 꼭 봐 줘야만 할 것 같다. 시멘트 기둥을 타고 올라간 울창한 넝쿨장미는 혈기왕성한 이십대를 닮아 있다. 흐드러지게 핀 붉은 꽃들은 정열적이다 못해 저돌적이다.

중앙 수로(水路) 양쪽으로 길게 두 줄 선 메타세콰이어는 10년 된 아파트의 위용을 뽐낸다. 중력을 거스르며 높이 곧게 뻗어있다. 직선이 주는 도도함에 압도돼 고개를 치켜들다 보면 그 끝은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다. 좌우 한눈팔지 않는 올곧은 심성이 부럽기까지 하다. 집은 연식이 오래되어 손볼 곳이 점점 많아지는데 정원은 해가 다르게 풍성해지고 농염해진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모습에 매일 경탄한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아파트는 담장이 쳐져 있고 1층에도 주차장이 있었다. 나무와 화단은 주차 구역을 피해 단출하게 꾸며져 있었다. 집안에 개인정원을 만드는 이도 많았다. 나 또한 베란다에 나무나 꽃, 채소 같은 것을 키워보기도 했다. 내 게으름과 무지로 인해 8년 동안 초록 생명이 무수히 죽어 나갔다.
자동차들이 모두 지하로 내려가고, 담장이 없는 지상 1층의 정원이 처음에는 낯설었다. '내 것'이 아니면 '남의 것'이라는 촌스러운 고정관념에 아파트 단지 안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그저 이동의 통로였다. 걸으면서 힐긋 둘러보며 계절감을 느끼는 게 고작이었다.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이웃을 만나면 어색했다. '왜 집에 안 들어가고 저러고 있을까?'

한해 두해 담장 없는 이곳에서 사계절을 보내다보니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공동 주거 공간.'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우리의 것. '공유'의 마음이 생겨났다. 적은 비용을 내고 게으른 내가 호사를 누리는 공간을 얻었다고나 할까. 온전히 내 것이라는 '소유'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으니, 담장 높은 재벌집 정원도 부럽지 않게 됐다. 우리 집 정원에는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두 개의 놀이터와 야외 수영장까지 있지 않은가.
집안 책장에 한자리 차지한 빳빳한 소장용 내 책이 아니어도 좋다. 읽고 싶은 책은 도서관에서 언제든 빌려 볼 수 있으니. 마당 있는 집에 나만의 정원을 가꾸는 재미가 없어도 괜찮다. 나와 내 이웃이 고용한 정원사들이 사계절 내내 우리의 드넓은 정원을 꼼꼼히 돌보고 있지 않은가. 생각이 유연해지니 감사한 마음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좋은 것이 계속 유지되고, 나쁜 것은 빨리 고쳐졌으면 하는 바람에 내 작은 수고를 보태본다. 쓰레기를 줍거나 꺾일 것 같은 나뭇가지를 정리해달라는 주문이 고작이지만 어쨌든 참견하기 싫어하는 성격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공유하는 삶이 내 마음속 담장도 무너뜨린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