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이 도시문화콘텐츠 기획자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재설계된다. 기술의 진보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확장시켰다. 멀티 태스킹이 가능한 환경이 제공되며 더욱 생산적인 시간을 갖게 됐다.
우리가 사용하는 주요 에너지원 또한 그 궤를 같이 한다. 전기, 수소차가 상용화되고 태양열 발전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행해지는 등 친환경적인 에너지원이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원이 석유에서 친환경 요소로 바뀐다는 것은 주유소가 충전소가 된다는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석유를 위해 존재했던 수많은 공간과 시간, 나아가 우리의 삶에 관한 커다란 전환을 포함한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문화비축기지는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폐쇄된 석유저장소를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사례다. 공원의 형태인 이곳은 석유 저장 탱크 다섯 동을 활용해 전시관, 공연장, 카페 등 문화시설을 설치했다. 콘크리트와 옹벽, 내외장재로 구성된 공간은 불과 반세기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치 근대 콜로세움을 보는 듯한 장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필자가 방문한 날은 마침 코스프레 촬영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미래에서 온 전사를 테마로 한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미래 세계를 향하는 그들과 과거를 담은 공간이 이루는 대비가 질문을 던져준다. 앞으로 100년 뒤, 이 장소를 찾을 미래의 그들은 석유가 없어질 사회에 대한 우려와 고민을 이해할 수 있을까.
먼 훗날 인류가 지금의 생활상을 역사 책으로 만나본다면 '석유'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석유가 우리의 생활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까지 엄청난 분량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산업 유산도 세계적으로 보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니 아마 그들은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를 만났다고 할 수도 있겠다.

석유가 없어질 시기를 대비해서 만들어진 이 거대한 공간 안에서 석유에 한없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비칠지가 흥미롭다. 석유 파동에 대한 인류의 위기감을 돌 하나하나의 염원을 담아 쌓았던 고대인들과 비교하며 배울지도 모른다.
석유비축기지는 1970년대 초반 1차 석유파동 이후 또다시 발생할지 모르는 위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석유를 저장해 둘 '만약'을 위해 조성됐다. 지금 당장은 쓸모 있지 않지만 어떠한 상황 안에서 필요한 물건을 두는 곳, 유사시를 위한 창고, 비상시 탈출할 계단과도 같은 맥락이다. 위기 시설로 간주되었던 석유비축기지에서는 외부인 침입을 가정해 갖가지 모의훈련을 행했다고 하니 그 당시 이곳의 시간과 공간은 오롯이 가정하에 움직였던 것이다.

공간의 탄생은 반드시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다. 흥미롭게도 석유비축기지의 국제 현상공모 당선작의 제목은 <땅으로부터 읽어 낸 시간>이었다.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 지켜야 할 무언가에 대한 의지가 그 땅으로부터 읽어 낸 시간이었을 테다. 결국 문화비축기지는 석유에 의존하는 시대가 만든 땅 위에 문화를 소비하는 시대가 쌓아올린 적층의 공간인 셈이다.

이제 문화비축기지에서는 독특한 공간을 배경으로 다양한 예술적 시도가 더해지고 있다. 오랜 시간 닫혀있던 금지의 공간은 주말마다 많은 이들이 가족과 함께 나들이하는 일상의 영역이 됐다.
인천에도 단절되었던 공간들이 우리 삶의 영역으로 다가오고 있다. 새롭게 열린 공간은 단순히 빈 땅이 아니라 그곳의 시간이 함께 따라온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인천의 의미있는 장소들이 우리 시대의 사유를 담아 한층 더 깊은 풍미를 갖는 공간으로 재탄생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