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 모르는 글, 아이들에게 백날 읽혀 뭣하랴
▲ 다산 선생이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아학편훈의' 이천자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이 한목소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쁜 버릇을 고쳐라"고 통매를 하였다.

요즈음 시류를 타고 한자 학습 또한 갖은 차림새로 학생들에게 짐을 지운다. 그 중, <천자문>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국내 수위의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천자문>에 관한 책을 검색해 보니 무려 600여권을 거뜬하게 넘는다. 무슨 공부에 마법이라도 되는 듯 <마법천자문>에서 만화까지, 학생들 있는 집에는 어김없이 <천자문> 한 권쯤은 예사로이 찾는다. 가히 <천자문>의 화려한 부활이다.

'마을의 꼬마 녀석이 천자문을 배우는데 읽기를 싫어하여 꾸짖었답니다. 그랬더니 녀석이 말하기를, "하늘을 보니 파랗기만 한데 '하늘천天' 자는 푸르지가 않아요. 이 때문에 읽기 싫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주려 죽일만합니다.'

연암의 '답창애지삼答蒼厓之三'이란 편지다. 전문이 겨우 서른 넉자에 불과하지만 시사하는 바는 차고 넘친다. '답창애지삼'은 유한준에게 준 편지이기에 의미하는 바가 깊다. 유한준은 '문필진한'이니, '시필성당'이니 외워 대던 사대주의의 전형적 사고를 지닌 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선생의 대화를 통해 연암은 자신의 언어인식을 재미있게 드러냈지만 저기에 <천자문>의 허가 숭숭 뚫려있다.

'아이의 총명함이 한자를 만든 창힐을 주려 죽일 만하다'는, 맺음 말결에 <천자문> 학습의 잘못됨을 경고하는 연암의 의도가 또렷하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본 하늘은 그저 파랄 뿐이다. 그런데 '하늘천' 자에는 전혀 그런 내색조차 없다. <천자문>의 첫 자부터 이러하니 나머지 999자를 어떻게 감당해 내겠는가. 그러니 '읽기 싫어요!' 외치는 어린아이의 내심을 똥기는 말이다.

사실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이 '천지현황天地玄黃'이란 넉 자의 풀이는 쉽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아닌가? 그렇다면 저 꼬마둥이처럼 글자 속으로 좀 들어가 보자. '하늘이 왜 검지요?'

'……?' 아마도 답을 내려면 동서고금을 넘나들이 하는 석학 선생이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우주의 진리를 담은 묘구다. 이를 두고 공부하기 싫은 어린아이의 자조적 푸념으로 치부하여 저 아이만 나무랄 게 아니다. 선생이 제대로 설명치 못하니 아이들은 직수굿이 공부란 그러려니 하고 중 염불 외듯 배강(背講, 책을 보지 않고 뒤 돌아앉아 욈)만 할 뿐이다. '배울 학(學), 물을 문(問)'인 학문은 여기서 사라진다.

<천자문>은 1구 4자 250구, 모두 1000자로 된 고시古詩이기에, 주석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지나치게 많다. 그런데도 아무런 비판 없이 우리나라에서 어린아이들의 학습교재로 쓰인 게 천 년하고도 수백 년을 더해야 할 만큼 그 연원이 오래다. 당연히 여러 선각자들의 비판이 있을 법한 데, 연암과 다산 이외에 눈 밝은 학자들을 찾기 어렵다. 이른바 사회적으로 공인된 관념의 틀거지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다산은 <담총외기談叢外記>에 실린 '천자문불가독설千字文不可讀說'에서 이 <천자문>의 폐해를 명확히 짚는다. <천자문>이 아이들에게 암기 위주의 문자 학습을 강요하여 실제 경험세계와 동떨어지게 한다는 지적이다. 즉 <천자문>은 천문 개념에서 색채 개념으로, 또 다시 우주 개념으로 급격히 사고를 전환하기에, 어린 아이들이 일관성 있게 사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아래는 <다산시문집> 제17권 <증언贈言>, '반산 정수칠에게 주는 말'이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데, 서거정의 <유합>과 같은 책은 비록 <이아>와 <급취편>의 아담하고 바름에는 미치지 못하나 주흥사의 <천자문>보다는 낫다. 현·황이라는 글자만 읽고, 청·적·흑·백 따위 그 부류를 다 익히지 않으면 어떻게 아이들의 지식을 길러 주겠는가? 초학자가 <천자문>을 읽는 것이 이것이 우리나라의 제일 나쁘고 더러운 버릇이다.'

저러한 선각께서 "이것이 우리나라의 제일 나쁘고 더러운 버릇( 最是吾東之陋習)"이라 했다. 뜻 모르는 글 암기만으로는 학문을 성취할 수 없어서다. 그래, '오동누습'이라고까지 극언하였거늘, 오늘날에도 아이들 책상마다 <천자문>이 놓여있으니 어찌된 셈인가? <천자문>으로 공부깨나 한 분들에게는 경을 칠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비단보에 개똥'이라는 우리네 속담을 생각해봄직도 하다. 이 대한민국, 저 연암과 다산 선생의 실학적 사고를 언제쯤 따라잡을까?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