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영 한국정신분석상담학회 회장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 처음 들어가서 자리를 잡으면 다음번에 대개 같은 자리에 앉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각자의 자리가 정해져 고정석이 생긴다. 어쩌다 늦어서 나의 자리에 못 앉고 다른 자리에 앉으면 그 시간 내내 불편하다. 이런 현상은 공간이 대형 강의실이든 작은 세미나실이든 상관없이 일어난다. 새로운 장소에 갔을 때 사람들의 이런 반복적인 행동을 발견하는 것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생각해 보면 그 공간에서 이 자리나 저 자리가 다 같은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최소한 내게는 말이다. 처음 낯선 공간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다 한자리를 선택한 것이고, 그자리는 낯선 공간에서 최초의 나의 자리다. 그 다음번에 갔을 때 어쩌나 고민하다 그 장소에서 익숙한 자리를 발견하고 그 자리로 간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다. 어떤 이는 자기 자리를 강박적으로 고수하고 어떤 이는 아무 자리나 앉는다. 이런 사람은 대개 늦게 오는 사람이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사무실이나 집을 고를 때 또는 식당에 갈 때 입구에서 아예 발을 돌리는 사람도 있다. 그냥 여기는 아니라는 판단이다. 심지어 객관적 조건들이 다 좋은 데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면 대개 아니라는 주관적인 느낌을 이야기한다. 객관적으로 아무리 그럴듯한 공간이어도 자신에게 그런 느낌을 주지 못한다면 아닌 것이다. 집 소개해 주는 중개인들이 자주 하는 말, 집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은 거부한 집을 왜 이 사람은 좋다고 선택하는 것일까. 단순히 돈의 문제는 아니다.

객관적이지 못한 이러한 태도는 무엇인가. 의식적으로 뚜렷한 이유를 가지고 대상을 선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전부일까, 아니 그 이유가 진짜 이유일까.
정신분석가들은 그때 무의식을 이야기한다. 무의식이란 실수나 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나 직업을 선택하거나 거주할 도시나 집을 선택할 때도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힘이다. 그 무의식 부분은 각자 자기(self)의 무의식적 부분이라고 하겠다.

'자기'는 수많은 내적 관계들의 역사가 축적된 것으로 아주 어릴 때부터 겪어온 정서적이고 심리적 현실들로 우리의 역사를 이룬다. 그 역사는 아기에 대한 엄마의 사적인 돌봄에서 형성된 독특한 문화에서 출발한다. 엄마가 안아주고 씻어주고 젖을 주고,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말을 걸고, 아기가 반응하는 관계의 언어가 둘만의 문화를 형성한다. 그 문화 속에서 아기 각자의 고유한 존재는 형성된다. 아기의 욕구를 들어주고 채워주는 엄마의 돌봄에 따라 아기의 상태는 좋거나 나쁜 것으로 변형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기 상태의 변형이 엄마의 침범으로 경험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엄마와 아기의 상호주관적 경험은 아기의 몸에 그리고 자기에 각인된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안아주는 환경'이라고 말한다. 아기를 안아주는 물리적,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환경을 다 포함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생애 초기에 받았던 환경-신체적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서의 느낌을 계속 추구한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그래서 그때 자기의 상태의 변형을 신호하는 어떤 사인을 현실에서 발견하면 그 대상을 추구한다. 그것이 배우자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고, 자동차일 수도 있고, 집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가 심할 때 어딘가로 자동차를 몰고 가거나 혹은 갈 수 없을 때 집 앞에서 혼자 차 안에 있으면 마음이 너무나 편해진다고 한다. 어떤 아내는 남편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일을 보는 것도 아닌데 오랜 시간을 안 나온다고 불평한다. 어쩌면 그 남편에게는 화장실이 편안하고 침범 받지 않는 장소일 수 있다. 단순히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심리적 장소로 그곳은 그에게 안아주는 환경일 수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대상을 평생 추구한다. 잡동사니가 쌓인 공간에서 사는 사람도 있다. 우리에게 그의 공간이 혼란일 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안전과 편안을 의미할 수 있다. 안아주는 환경의 단서는 각자의 존재가 형성될 때 존재 자체에 각인된 것으로 우리가 아는지도 모르는 그런 앎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에는 우리 생애 초기의 돌봄의 흔적을 반영하는 무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