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양주 종합촬영소 내 판문점 세트.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옛 안양촬영소 신필름예술센터. /사진제공=안양시

 

▲ 안양촬영소의 설립자 홍찬이 제작 투자한 한국 최초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이강천 감독이 연출을 맡았던 1958년作 '생명'의 한 장면. /사진제공=안양시

 

▲ 오창희 경기콘텐츠진흥원장.


1919년 '의리적 투구' 첫 영화 개봉
안양촬영소 10년간 300여 편 제작
1997년 개장한 남양주 종합촬영소
'JSA' 등 '명작' 탄생…관광지 부상


올해 2019년은 '100'이라는 숫자가 유독 눈에 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된 해이자 임시 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되는 해. 올해는 특별한 숫자만큼이나 뜻깊다. 우리 역사에서 100년을 지내온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한국 영화가 최초의 극장 상영과 동시에 한국 영화사(史)의 시작을 알린 해 역시 1919년이다. 1000만 영화 시대의 개막, 세계 영화제에서 인정받는 우리 영화와 경기도의 영화 산업은 100년의 시간 동안 얼만큼 와 있을까? 한국 영화가 걸어온 100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100년을 준비하는 '경기 영화 산업'의 청사진을 그려 보았다.

#영화 100년사의 시작
1919년 10월27일, '단성사'에서 상영한 김도산의 '의리적 구투'를 한국 영화사는 최초의 영화로 기록하고 있다. 초창기 영화의 형태는 연극과 영화가 혼합된 형태로 연극 막간에 스크린을 영사하는 방식으로 상영됐다. 그런 탓에 온전히 필름의 영사 형태로 상영한 1923년 윤백남 연출의 '월하의 맹서'를 영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20년대 후반, 한국 영화가 자생력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한국 영화사는 전환점을 맞았다.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 받는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이 시기에 제작됐다. 1930년대 들어 사실주의와 계몽주의 경향의 영화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영화 '아리랑'의 영향이 컸다. 광복 이전까지 일제의 황국신민 정책에 의해 '조선영화 통제령'이 내려지면서 한국 영화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위기를 맞는다. 침체를 벗어난 것은 해방과 함께 광복 영화, 해방 영화 등이 제작되면서부터였다.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 이구영 감독의 '안중근 사기' 등이 대표적이다.

해방 후 한국 영화는 암흑기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영화 산업은 폐허로 변했다.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재기의 발판이 마련됐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의 흥행 성공으로 정부는 영화 산업 진흥을 위한 정책들을 내놓았고 덕분에 영화 제작이 붐을 이뤘다. 1960년대는 한국 영화사에 황금기였다.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감독은 각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오발탄', '하녀' 등 한국 영화사 최고의 작품들을 쏟아 내며 이 시기를 이끌었다. 5·16 쿠데타를 비롯한 이데올로기적인 제약과 검열 속에서도 212편에 이르는 영화를 제작하며 한국 영화 산업은 놀라운 성장 속도로 발전했다. 한국 영화 산업의 전기를 만든 1990년대에는 감독보다 프로듀서가 중심이 된 기획 영화가 등장했다. 신씨네의 '결혼이야기', 명필름의 '접속' 등은 현재 한국 영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대규모 배급 시스템의 정착, 시스템 변화 등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의 무대에서 오늘날의 한국 영화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충무로 이전의 충무로 '안양촬영소'
한국 영화 제작의 산실이자 메카로 불리는 '충무로', 그 이전에 '안양촬영소'가 있었다. 1957년 국내 최초로 지어진 종합촬영소였던 안양촬영소는 한국 영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 수도극장과 국도극장을 소유하고 있던 수도영화사는 안양시 석수동 일대 3만3500평 부지 위에 최신식 영화 기자재를 갖춘 촬영소를 건립했다. 당시만 해도 아시아 최대 규모로 불렸던 안양촬영소는 동시녹음이 가능한 2개 스튜디오를 비롯해 500평대 스튜디오와 필름현상 시스템, 소도구, 대도구 제작실, 분장실, 촬영장비 저장소 등이 완비된 영화 제작소였다. 뿐만 아니라 공중 샤워시설과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 같은 편의시설까지도 갖췄다. 게다가 미국 MGM 영화사를 통해 들여온 미첼 NC 카메라 3대와 웨스트렉스 녹음 시스템 일체 등 최신식 기자재들이 구비돼 동양 최대 규모로 손꼽힐만 했다. 영화 제작의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곳을 '영화 공장'이라 칭했다. 안양촬영소의 설립자는 평화신문사의 사주이자 수도극장, 국도극장을 소유했던 재력가 홍찬이다. 그는 한국 최초 시네마스코프(와이드 스크린 방식에 따른 대형 영화) 영화인 이강천 감독의 '생명'과 두 번째 작품 박상호 감독의 '낭만열차' 등을 선보이며 영화 제작에도 나섰지만 흥행 참패로 이어지면서 수십억원의 부채를 떠안게 됐다. 설립된 지 2년 만에 부도 위기를 맞게 된 안양촬영소는 1966년이 돼서야 비로소 신 필름에 인수됐고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재도약에 나서게 된다. 특히 안양예술고등학교의 전신이기도 한 '신필름영화예술학교'를 안양촬영소 내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영화인 양성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불어 닥친 한국 영화계의 불황과 과도한 제작, 무리한 합작, 제작 인력의 비대화 등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신 필름은 결국 부도가 났고 1975년, 결국 안양촬영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현재 안양촬영소 부지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안양촬영소를 표시하는 푯말만이 남아있다.

#모든 영화는 '남양주 종합촬영소'로 통한다
한국 영화사에서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빼놓을 수 없다. 국내 영화 가운데 이곳을 거치지 않고서는 제작하기 어려웠을 만큼 남양주 종합촬영소는 영화 그 자체였다. 1997년 11월22일에 개장한 남양주 종합촬영소는 남양주시 조안면 일대의 약 40만평 부지에 영화 촬영용 야외 세트와 6개의 실내 촬영스튜디오, 녹음실, 각종 제작 장비 등을 갖춘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 제작 시설이었다. 남양주 종합촬영소가 일반인들을 위한 관람 체험시설로도 개방되면서 2017년까지 380만명이 다녀갈 만큼 경기도를 대표하는 관광지로써 톡톡히 역할해 왔다. 촬영소는 시나리오만 있으면 한 편의 영화를 원스톱으로 제작할 수 있도록 영화 제작의 모든 여건이 갖춰져 있다. 제1스튜디오부터 제7스튜디오까지 400평 규모의 대형 스튜디오 시설과 각종 녹음과 디지털 녹음, 동시 녹음, 국내 유일의 192채널 디지털믹싱스테이지 등이 가능한 영상관, 특수 영상제작이나 필름 현상이 이뤄졌던 영상 지원관, 판문점 세트, 전통한옥 세트, 민속마을 세트 등과 민간 소음 피해 없이 자유롭게 폭파신 연출이 가능한 야외 세트장을 갖추고 있다. 또 휴게시설과 객실이 위치한 춘사관은 장기간 체류하는 영화 제작자들의 편의를 도왔다. 국내 최고 수준의 영화 촬영소인 남양주 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 영화 및 방송, CF만 해도 매년 150여편이다. 판문점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오면서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알린 1등 공신, '공동경비구역 JSA'를 비롯해, '취화선', '공공의 적', '실미도', '스캔들', '살인의 추억', '왕의 남자', 드라마 '도깨비', '신과 함께', '극한직업'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쟁쟁한 영화와 방송 드라마들이 남양주 영화촬영소를 모두 거쳐 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양주 종합촬영소는 올해 10월을 기점으로 문을 닫게 됐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해 왔던 영화 촬영소는 2013년 공공기관 지방 이전 법에 따라 부산으로 이전을 추진하게 됐고 결국 해당 부지를 매각했다. 현재 남양주 종합촬영소에서는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될 '해적2'를 끝으로 운영이 모두 종료된다.

영화진흥위원회 장광수 소장은 "영화 역사에서 남양주 종합촬영소는 보존 가치가 충분한 장소이다.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거치지 않고는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을 만큼 큰 역할을 했다"며 "부산에 거점을 두게 됐지만 지리적 여건상 남양주 종합촬영소가 해왔던 역할을 모두 대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수도권 지역에 제2의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찾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오창희 경기콘텐츠진흥원장 인터뷰]
"독립·저예산 예술영화 지원 늘려 다양성 영상 문화 향유 기회 제공"

"독립·저예산 예술영화의 지원을 통한 다양성 영상 문화의 향유 기회를 제공하겠습니다."

한국 영화사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경기도 영상산업의 한 축을 담당해 온 경기콘텐츠진흥원의 오창희 원장의 감회는 남다르다. 한국 영화 산업에서 거대 자본의 유입은 전광석화와 같은 성장을 이뤄낸 반면 정형화된 상업 영화 제작을 강제하고 독립영화, 저예산 예술영화들이 도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경기콘텐츠진흥원은 이에 대한 해결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 독립영화, 다양성 영화에 대한 제작 지원을 역점 사업으로 제시하고 있다.

오창희 원장은 "올해는 한국 영화사가 100년을 맞이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100년을 준비해야 하는 해이다"라며 "콘텐츠진흥원에서 최우선 과제이자 가장 주안점을 두는 부분은 다양성 영상 문화 저변 확대에 있다. 대형 기업에 밀려 주목받지 못하고 상영조차 되지 못하는 독립영화, 저예산 예술 영화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경기 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 콘텐츠진흥원에서는 다양성 영화 지역 개봉 상영관 4개소를 비롯, 31개 시·군 공공·민간 시설 35개소의 상영관을 발굴해 운영하고 있다. 특히 '경기도 문화의날'과 연계한 '다양성 영화의 날'을 정하는 등 문화 행사를 통한 다양성 영화의 저변 확대에 힘쓰고 있다.

오 원장은 경기도의 영화 산업 도약의 시기를 올해로 내다보고 주춤한 영화 산업에 동력을 불어넣기 위한 경기도의 선도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경기도는 영화산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저력을 충분히 갖췄다. 포화상태에 이른 서울 중심적 영화 산업에서 경기도는 신선하고 실험 정신이 깃든 대안을 제시하며 영화 인프라를 구축을 위한 최적의 이점을 갖춘 지역이다. 이에 경기콘텐츠진흥원은 진일보한 사업 운영을 통해 영화 산업의 균형 있는 부흥을 이끌어 낼 계획이다"고 말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