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꿈, 인천서 싹 틔운 홍진
▲ 만오 홍진의 묘비.' 청년 동포여, 병든 나라 고치는 병원의 일꾼이 되자'는 문구가 그의 절절한 애국심을 웅변하고 있다. /인천일보 DB
▲ 만오 홍진의 묘비.' 청년 동포여, 병든 나라 고치는 병원의 일꾼이 되자'는 문구가 그의 절절한 애국심을 웅변하고 있다. /인천일보 DB

 

▲ 1919년 4월2일 13도 대표자회의가 열렸던 자유공원(당시 만국공원) 전경. 13도 대표자회의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의 초석이 된다. /인천일보 DB
▲ 1919년 4월2일 13도 대표자회의가 열렸던 자유공원(당시 만국공원) 전경. 13도 대표자회의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의 초석이 된다. /인천일보 DB
▲ 동아일보 1946년 9월10일자 1면에 실린 '홍진 의장 별세' 기사. /인천일보 DB
▲ 동아일보 1946년 9월10일자 1면에 실린 '홍진 의장 별세' 기사. /인천일보 DB

 

'경술국치' 후 애국지사 변론 활동
3·1운동 및 '한성정부' 조직 앞장
상하이 망명 후 임시의정원 의장에
해방 이듬해 서거…문학산에 묻혀


"청년 동포여, 병든 나라 고치는 병원(病院)의 일꾼이 되자."

만오 홍진(1877~1946)은 조국 독립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몇 글자는 자체가 '애국'이요, 해방된 금수강산을 향한 이 시대 젊은이를 향한 외침이다.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홍진의 생을 걸으며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곳이 인천이다. 1919년 3·1만세운동 즈음 독립단체 중 정통성을 인정 받고 대표성이 각인된 한성정부는 1919년 4월2일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이를 초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법통을 이어받아 현재 대한민국 탄생의 도화선이 됐다. 흔적이 사라진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의 한성정부 혼을 느끼며, 100년 전 독립을 향한 선열의 정신을 되새겨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해주(현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령정부'를 비롯해 서울에 수립된 '한성임시정부'가 뭉쳤다.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4월23일 '한성임시정부'의 뼈대와 틀을 계승했다.

인천은 한성임시정부의 모태가 되는 곳이다. 1919년 4월2일 만국공원에서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13도 대표자회의가 열렸고,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인 만오 홍진 등을 통해 탄생했다.

▲ 만오 홍진 선생. /인천일보 DB
▲ 만오 홍진 선생. /인천일보 DB

 

▲홍진이 꿈꾼 대한민국
만오 홍진(洪震, 1877.8.27~1946.9.9)은 부산 개항 직후인 1877년 8월27일 서울 차동(車洞, 현재의 서소문)에서 풍산홍씨(豊山洪氏) 재식(在植)과 청주한씨(淸州韓氏) 수동(壽東) 사이의 3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적은 충북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 처음 이름은 면희(冕熹)였으나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홍진으로 바꾸었고, 만오(晩悟)와 만호(晩湖)라는 호를 사용했다.

1898년 법관양성소 졸업 후 평리원(平理院) 판사, 충주재판소 검사를 지냈고, 1910년 경술국치 때 변호사가 되어 경성부와·평양 등지에서 애국지사를 변론하는 법정 투쟁을 계속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에 연락책임을 맡았다.

홍진은 1919년 3월17일 기독교 전도사 이규갑(李奎甲) 등과 함께 동료 검사 한성오(韓聖五)의 집에서 회합해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조직하고 4월2일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정부 조직을 결정했고, 서울에서 4월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해 한성정부의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기로 결의했다.

홍진은 4월8일 정부 조직표와 조각 명단을 휴대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그는 11월 임시의정원 충청도 선거위원장 활약했고 1921년 4월 장붕(張鵬)의 뒤를 이어 상하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단장으로 5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홍진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서거했고, 선영이 있던 인천 문학산에 묻혔다.

대중일보 1946년 9월15일자에는 홍진의 장례식 과정이 보도됐다.

"기미년 3·1운동 이후 30년 조국해방의 기쁨을 품고서 고국에 돌아온 지 아홉 달, 조국재건의 일편단심 그 절개야 어찌 이 강토 구원한 빛이 아니랴. 그 덕행과 영광을 추모하는 수백의 동리 사람들이 길가에서 엄숙히 고개 숙여 영구를 맞이하는 가운데 장의 행렬은 선산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중략) 고인의 손자 홍석주 4형제의 애곡, 더욱 중인의 가슴을 쥐어짜는 애절한 가운데 매장식도 엄숙히 끝나 일세에 풍비하던 위대한 애국 지도자 만오(晩悟)가 고이 안식에 잠드시다."

▲한성정부 혼, 계속된다
한성정부 만국공원 13도 대표자회의는 정부 조직안을 다룬 국내 유일 사전 협의였다.

13도 대표자회의가 서울이 아닌 인천에서 왜 열렸을까.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곳은 물론 일제강점기 전까지 외국의 조계들이 밀집했던 '만국공원'의 국제적 상징성을 감안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또 인천에 홍진 선생의 선영이 있었던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상하이로 건너간 홍진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해주 노령정부의 통합에 앞장섰다. 1919년 9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통합정부가 조직됐음을 공포했다.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가 1988년 발표한 논문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임시정부의 통합정부 수립운동'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통합과 함께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할 것이니 국내의 13도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인 것을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홍진의 묘소는 1984년 12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인천시 중구는 자유공원에서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회의'가 개최된 지 100주년이 되는 4월2일 '인천지역 독립운동 관련 사업의 현황과 앞으로의 방향 모색'이라는 주제로 학술포럼을 열고, 인천시립박물관 역시 한성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맞춰 관련 행사를 준비 중이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