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용 계양문화원장


올해로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됐다. 그러나 아직도 일본이 우리의 귀중한 유산을 마구 훼손시켜버린 것을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조국 해방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조들에게 면목이 없다. 계양구에는 옛 부평지역을 관할하던 부평도호부 관아가 있었다.

인천에는 두 곳의 도호부가 있다. 계양구 부평초등학교 교정에 부평도호부, 미추홀구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인천도호부이다. 두 곳 도호부는 인천시 지정문화재 1·2호로 지정돼 있다. 더 늦기 전에 부평도호부의 발굴과 복원에도 힘써야 한다. 현재 부평초등학교 교정 내에는 도호부 관아 1개 동, 욕은지, 정조 임금이 활을 쐈다는 어사대, 관아에 풍치목으로 심어진 약 60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현존한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지방 호족 중 부평 이씨의 시조인 이희목이 자신이 관할하던 계양산 북편 지역 수소(樹蘇)마을을 왕건에게 바쳐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고, 이곳이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수주(樹州)라고 고쳐졌다. 이후 수주는 의종 4년(1150년)에 안남(安南)도호부로 바뀌었다. 안남이라는 지명은 고려의 수도 개경의 남쪽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전주, 고부, 영암, 다시 전주로 옮겼다가 마지막으로 부평에 설치되었으니, 이곳 도호부가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의종 19년(1165년)에 배곶이(현 이화동)에 있는 안남도호부 관아를 중구봉(현 경인교대 뒷산) 아래 온수골로 이전했다. 고려 고종 2년(1215년) 안남도호부를 계양도호부로 개칭했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계양도호부가 임시 길주목으로 승격됐다가 2년 후 충선왕 2년(1310년)에 부평부로 바뀌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부평부가 부평도호부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자리에 관아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호부에 풍치목으로 심어진 은행나무의 수령이 약 600년인 것이 설립 연도와 맞아떨어진다. 다만 기록이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부평도호부는 객사(客舍), 아사(衙舍), 부창(府倉), 연무당(鍊武堂), 군기고(軍器庫), 향청(鄕廳), 장관청(將官廳), 인리청(人吏廳), 별초사청(別抄士廳), 사창(社倉), 화약고(火藥庫) 등 총 27동 232칸, 1만여평의 대규모 관아였다고 한다. 이러한 규모는 인천도호부를 능가하는 것으로, 부평지역이 고려시대 이후로 중요한 도호부였음을 알 수가 있다.

부평도호부 관아 터에는 부평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1899년 개교하여 120년의 역사가 있는 학교이나, 한때 3000명을 넘어설 정도였던 학생 수가 현재는 500명도 안 된다 하니 이대로 간다면 폐교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2013년 계양구는 문화재 정비계획으로 부평도호부 발굴·복원 계획을 세워 추진했으나, 학교 측과 동문회의 이견으로 연기됐다. 하지만 현재는 학생 수의 감소로 인해 더 늦기 전에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복원을 시작할 시기라고 본다.

부평초등학교는 인천에서 창영초등학교와 함께 가장 오래된 학교이다. 이제 계양산이 품고 있는 이곳 부평도호부를 다시 세울 때가 됐다. 계양구가 역사와 전통이 흐르는 도시로 복원된다면 계양구민은 물론, 부평도호부가 관할하던 인근 지역민들의 학습장이 돼 우리의 후손들과도 끊임없는 대화가 이어질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