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4. 3·1운동 - 하
[3·1운동 100주년] 4. 3·1운동 - 하
  • 이주영
  • 승인 2019.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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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 혼 깃든 강화서 목 터져라 외친 "독립만세"
▲ 유봉진 선생.
▲ 유봉진 선생.

 

강화 몽골항쟁 등 나라 위기 때마다 앞장
기독교인 중심 결사대 조직해 만세운동

길직교회 지도급 인사들 3·1운동 모의

선두교회 독립선언서 등 수백매 인쇄
잠두교회 청년들 독립 유인물 인쇄·배포

유봉진 선생 대한제국 강화진위대 장교
길직교회에서 세운 계획 다른지역 전달
강화읍내 종루에 올라 종치며 독립 알려

1919년 3월18일 지방 최대 만세운동
군청·장터에 2만명 모여 한 달간 계속
4월1일 봉천산서 횃불시위로 타올라
1920년 철산면서 '조선독립만세' 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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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는 이땅의 성지이다.

겨레의 혼이 깃든 이 곳은 나라와 민족 앞에 우환이 닥칠 때마다 앞장섰다.

몽골항쟁의 뿌리가 강화에서 발원해 제주까지 뻗었고, 조선의 크고 작은 외세 다툼 때마다 강화로의 피란은 계속 됐다.

인후지지(咽喉之地)인 이 곳은 조선말과 대한제국 때 외세의 살육도 버텨냈다.

조국을 뺏긴 설움과 아픔을 3·1운동으로 승화시킨 강화, 그 때 울린 '대한독립'의 함성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강화에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돼 결사대를 조직하고 장날을 이용해 장터, 향교 등으로 이동하며 만세를 불렀다.

길상면 길직교회와 선두교회, 잠두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수백 매를 인쇄해 배포하는 등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18일 강화읍 장날 만세운동에 모인 시위대가 2만명에 달했고, 강화군수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 요구했다.

또 경찰에 연행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속했다.

강화에서는 한 달이나 심야 횃불시위와 독립만세운동이 지속됐다.

특히 강화보통학교 학생들은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만세운동에 나섰다. 강화 철산리 주민들은 3·1운동이 발발한 이듬해인 1920년에도 백지에 독립만세란 글씨와 태극기를 그리고 격문을 발표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펼쳤다.

▲ 3·1운동 모의하고3·1운동 만세시위 모의한 길직교회의  3·1운동 기념비.
▲ 3·1운동 모의하고3·1운동 만세시위 모의한 길직교회의 3·1운동 기념비.

 

▲길직교회 3·1운동 만세시위 모의지

1919년 3월18일 강화 만세운동을 모의한 곳. 기념비가 있다.

- 1919년 3월9일 오후 3시쯤 길직리 예수교회당에서 길직리의 조종환, 장면순, 장동원, 장상용, 장삼수, 장흥환 등과 선두리의 황유부, 황도문, 염성오, 유희철, 온수리의 유봉진, 상방리의 이진형 목사 등이 회합했다.

이들은 주로 길직교회와 선두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온 황도문과 조종환은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관한 상황을 전하고 강화에서도 만세운동을 할 것을 제안했다.

유봉진(1886~1956)은 은세공업자로 원래 대한제국 강화진위대 소속 군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유홍준 역시 강화진위대 장교를 지냈다. 정미의병 활약 후 일제 군경의 감시망을 피해 감리교회 권사 신분으로 지냈다.

이에 돌아오는 장날 중 여건이 좋은 날을 정해 이진형 목사가 부내면 신문리의 잠두교회와 의논해 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했다. 이후 여러 번의 협의를 통해 18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 독립선언서 인쇄하고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선두교회 전경.
▲ 독립선언서 인쇄하고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선두교회 전경.

 

▲선두리교회 독립선언서 인쇄지

1919년 3월18일 강화 만세운동에 쓰일 독립선언서를 등사·인쇄한 장소. 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 1919년 3·1만세운동의 여파로 시작된 강화군민의 만세운동을 위해 선두리교회 황유부 전도사의 집에서 황도문, 유경호, 염성호, 황도성 등은 황유부의 등사판으로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수백 매를 인쇄했다.

황도문은 더불어 '강화인민에게'라는 문서와 독립가를 작성했다. 항일문서는 염성오를 통해 주로 배포됐고, 황용근은 15일 하도면 상방리의 교회 전도사 김양권, 문산리의 서당교사 박기천에게 문서를 전달했다.

양도면 삼흥리 강문호 목사, 능내리 이정갑은 황유부로부터 황도실에게 이어진 이들 문서가 손에 쥐어졌다. 읍내에는 국화리 거주 감리교회 전도부인 김유의가 이 문서 전달을 맡았다.

황도문(1897~1950)은 당시 연희전문학교 2학년생이었다. 그는 3월1일 탑골공원 만세운동과 3월5일 남대문역 학생 연합 시위에 모두 참가했다. 황도문은 3·1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조선독립신문 등을 갖고 배편으로 고향 강화도에 도착했다.

▲ 독립 유인물 인쇄·배포하고독립 유인물을 인쇄하고 배포한 강화잠두교회 기념관.
▲ 독립 유인물 인쇄·배포하고독립 유인물을 인쇄하고 배포한 강화잠두교회 기념관.

 

▲강화잠두교회 항일운동지
이동휘가 다닌 교회이며, 1907년 일본군의 강화기독교인 탄압에 저항하고 1919년 3월18일 잠두교회 청년교인 7명이 독립유인물을 인쇄·배포한 곳. 교회 로비에 항일 운동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 1905년 3월3일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이동휘는 지방전도사인 김우제를 통해 감리교에 입교하고 강화잠두교회에 나갔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된 후 격렬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수원 일본군의 강화진압으로 갑곶진 전투에서 50여 명의 의병이 사살됐고, 강화잠두교회가 반일운동의 준동지로 지목돼 일본군이 포위 했다.

1919년 3월18일 강화읍 만세운동이 있은 후 조구원을 비롯한 강화잠두교회에 출석하는 청년교인 6명 등이 강화읍교회에서 비밀조직을 결성한 후 독립운동 격문을 부착하고, 자유민보 등 10여 종류의 유인물을 배포했다.

그리고 이들은 읍내 상인들에게 철시를 종용하고, 경찰로 근무하는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다 4월20일 체포됐다.

▲ 1919년 3월18일 강화서 '3·1 운동' 타오르다1919년 3월18일 강화지역 주민 2만명이 강화군청과 장터 등에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사진은 강화군청 3·1운동기념비.
▲ 1919년 3월18일 강화서 '3·1 운동' 타오르다1919년 3월18일 강화지역 주민 2만명이 강화군청과 장터 등에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사진은 강화군청 3·1운동기념비.
▲ 1919년 3월18일 강화서 '3·1 운동' 타오르다 강화읍민들의 대규모 시위는 1919년 4월1일 봉천산 봉천대 횃불 만세시위로 타올랐다. 사진은 봉천산 봉천대 전경.
▲ 1919년 3월18일 강화서 '3·1 운동' 타오르다 강화읍민들의 대규모 시위는 1919년 4월1일 봉천산 봉천대 횃불 만세시위로 타올랐다. 사진은 봉천산 봉천대 전경.

 

▲강화읍·봉천산 등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18일 강화지역 주민 2만명이 강화군청과 장터 등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 4월1일 하점면민들이 봉천산에서 횃불시위를 했고, 같은날 양사면 철산리 산이포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나섰다. 1년 후 옛 양사면사무서에서는 양사면 철산리 청년 3명이 독립벽보를 부착하고 만세시위를 독려했다.

- 1919년 3월5일쯤 유봉진은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귀향한 선두리 황도문으로부터 서울 만세운동 경위를 듣고 강화 만세운동을 결심했다.

3월9일 길직리교회에서 만세운동 계획을 모의 후 유봉진은 강화도 다른 지역에 잠행해 만세운동 계획을 알렸다. 황윤실, 황일남, 조상문, 장동원, 장명순, 유희철은 만세운동에 앞장서기로 결의하고 결사대를 조직했다. 선두리교회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 등은 김유의를 통해 읍내로 반입됐다.

3월18일은 강화에 장이 열리는 날로 오후 2시가 되자 결사대를 선두로 해 강화읍 신문리와 관청리 사이의 돌다리 부근에서 만세를 먼저 부르기 시작해 관청리 장터, 향교, 군청, 경찰서로 진격해 갔다. 군청과 장터 등에 모인 인파는 2만명으로 전국 최대의 지방시위였다. 유봉진은 강화읍내 종루에 올라 종을 치며 독립을 알렸다.

오후 11시쯤까지 이어진 시위는 독립연설회와 체포된 유희철 석방 등을 요구하며 이어졌다. 일경 5명이 나섰다 실패하자 일군 40명이 추가 출동했다. 다음날 온수리 만세시위는 증파된 군과 경찰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2000명의 읍내 시위가 열렸다.

3월18일과 27일 강화읍민들의 대규모 시위는 4월1일 하점면 봉천산 봉천대 횃불 만세시위로 타올랐다.

이 사건으로 43명이 회부돼 옥고를 치뤘다. 철산리 신이포는 1908년 의병 7명이 전사한 곳으로, 4월1일 오후 8시40분부터 자정까지 등불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후 해산했다.

1920년 음력 7월15일 철산리 주민 오용진과 임두엽은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같은 마을 임학순 집에서 종이에 태극기를 그리고 "조선독립만세! 슬프도다. 슬프도다"를 적었다. 또 황준실과 함께 군중을 규합해 8월 초 양사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곳에서 태극기와 함께 "우리 조선동포는 이 글을 보라. 애통한 마음은 누구나 있다. 이 마음이 없는 자는 새나 짐승과 다름이 없다. 애국심을 모르는가"라고 썼다. 이 시위로 오용진과 임두엽, 임학순은 각기 1년형을 언도 받았다.

- 봉천산과 철산면 만세시위지는 위치 파악이 필요하고, 양사면사무소는 6·25 전쟁 때 폭격당한 후 현재 밭으로 경작 중이다. 장터는 한 때 해병대 연병장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공터로 남아 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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