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만세" … 1919년 이들의 함성은 뜨거웠다

 

 

 


'인천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인천 첫 독립만세 운동지 … 이만용 등 학생들 거리로

역사적 장소 '만국공원'
13도 대표자 모여 임시정부 수립 결의

이은선 순국지 '황어장터'
심혁성 주도 … 300여명 시위 '인천지역 만세운동 도화선'

'용유면' 만세시위
독립운동단체 '혈성단' 결성 … 조종서·최봉학 등 옥고




100년 전이다.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인천 곳곳에서 울렸다. 한 달 이상 계속된 격렬한 독립운동은 역사 속에 남아 현재 인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강한 울림으로 기억된다. 주권재민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도전과 시련에 맞닥뜨리며 각성을 요구한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선열이 지켜낸 주인의식을 어느정도 완수하며 살고 있을까. 한 세기전 인천 3·1운동의 현장을 걸어본다.

인천지역 3·1운동을 날짜별로 정리했다. 1919년 3월6일 인천공립보통학교생들의 동맹 휴교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8일 독립선언서와 시위 참가를 호소하는 격문이 시내에 뿌려지며 학생과 서민, 종교인까지 모두가 나섰다. 3월9일 약 300여명이 각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고, 3월13일 강화도 만세운동은 소래산과 계양산으로 퍼졌다. 3월24일 부평 장날을 이용한 시위와 면사무소 습격에 일본 헌병은 총과 칼로 위협하며 강제 해산시키려 했고, 3월28일 문학동 일대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다. 3월30일 인천부 시내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고 만세 운동에 뜻을 같이 했고, 화평동과 북성동 일대에서 천도교인 수백명이 만세 시위에 동참한다. 또 4월1일 월미도에서 수 천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 창영초등학교에 세워진 '인천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 기념탑.
▲ 창영초등학교에 세워진 '인천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 기념탑.

 

▲인천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지
1919년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벌이고, 일본의 연락보고용 전화선을 절단했던 곳.
- 인천의 첫 독립만세 운동지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1907년 5월6일 개교한 인천 지역 유일의 공립보통학교이다. 1919년 3월6일부터 4일간 동맹휴학을 벌이고,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로 인해 교직원들은 각각 자기 학교의 상황을 경찰에 보고했고, 이를 반발해 이 학교 3학년 김명진(당시 18세·11회 졸업)과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 등은 3월8일 오후 9시쯤 학교로 들어가 미리 준비한 전선 절단용 가위로 2층에 가설해 놓은 실내도입 전선을 절단하고 수화기를 박살냈다. 이 일로 김명진은 수화기 횡령사건 죄목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고, 이만용과 박철진은 태형 90대, 손창신은 연소자라 풀려났다.
인천보통학교 만세운동은 인천 전역에 번지며 7일의 만세운동과 8일의 독립선언서 배포로 이어지게 됐다. 3월9일 오후에는 기독교도와 청년학생들이 만국공원에 모여 외치다 일제 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다. 현 창영초등학교 내에는 1995년 3월6일 총동창회에서 세운 '인천지역 발상지'기념비가 있다. 옛 교사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돼 있다.
- 인천지역 독립운동 발상지로 공간적 의미가 매우 크다. 또 교내에는 옛 모습을 지닌 건물과 함께 만세운동 기념비 및 자료관 등이 있어 이에 대한 효율적 홍보 교육과 관리 등이 이뤄지고 있다.

▲ 옛 만국공원 모습.  /인천일보DB
▲ 옛 만국공원 모습. /인천일보DB

 

▲인천 만국공원
1919년 인천 3·1운동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자,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린 곳.
- 만국공원은 1888년 11월9일 조성돼 각국공원이라 불렸다. 이 곳은 서울 파고다공원보다도 5~6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제물포항 개항 이후 개항장 일대에 설치한 각국 조계지역의 완충지역이다. 만국공원, 서공원 등으로 부르다 1957년 공원에 맥아더 동상이 세워지면서 자유공원이라 불렀다.
1919년 3월7일과 8일 시내 각지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신포동에서는 상가 철시를 주장하는 전단이 뿌려지기 시작해 30일에는 모든 상가들이 철시를 하며 독립 만세 운동에 무언의 동조를 했다. 앞서 3월9일 만국공원과 시내에 수백명의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치다 해산했다.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3월 이교헌·윤이병·윤용주·최현구·이용구·김규 등이 이규갑에게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했다. 인천시내 만세운동이 잦아들던 1919년 4월2일 만국공원에서 이규갑·홍면의·안상덕 등 13도 대표들은 이날 독립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했다. 이 임시정부가 상해 및 연해주 대한민국의회와 더불어 3대 임시정부의 하나로서 임시정부 정통성의 근간이 된 '한성임시정부'이다.
13도 대표들은 임시정부선포문을 통해 "3·1민주혁명을 바탕으로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본대회는 민의에 의해 기(基)하여 임시정부를 조직, 약법을 제정해 이를 선포한다"라며 국민대회취지를 포고했다. 따라서 한국이 독립국임과 함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대내외에 알린 것이다. 이때 발표된 정부 주요 인사는 이승만·이동휘 등 24명이다.
이후 1919년 9월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이 공포되며 상해임시정부와 통합하게 됐다.
- 인천 만국공원은 인천의 개항과 관련된 사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인천지역의 항일운동과 관련한 사항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임정수립의 근간이 되는 역사적 사건의 중요성이 덜 부각되어 있다. 따라서 기념표석 설치와 더불어 재조명이 필요하다.

▲ 황어장터와 만세탑.
▲ 황어장터와 만세탑.

 

▲황어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이은선 순국지
1919년 3월24일 부평군 황어장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전개된 곳, 만세시위 중 이은선이 일제 경찰에 의해 사망한 곳.
- 황어장은 부평군의 대표적인 장(3, 8일장)으로 1910년대에는 하루 1000여명이 운집하는 장소이다. 원래 잉어를 매매하는 장이 섰던 곳이었으나 일제시기에는 주로 소가 평균 200여마리씩 거래됐다.
1919년 3월24일 오후 2시쯤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에 거주하는 심혁성이 주도하는 가운데 300여명이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만세시위 중 심혁성이 주재소 경찰 4명에 의해 면사무소로 끌려가자 군중은 더욱 흥분하여 만세운동이 격해졌다. 전원순·최성옥·이금산 등이 앞장 선 가운데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에워싸고 밤새 시위를 했다. 다음날 인천경찰서에서 무장 경찰이 출동해 총검으로 압박하자 시위대는 해산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심혁성은 징역 8월, 이담은 징역 2년, 임성춘 1년, 최성옥과 전원순이 징역 10월, 이공우가 벌금 20원의 형벌을 받았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이후 인천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심혁성은 출소 후 약초를 캐며 은둔생활을 하다 고향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이은선은 심혁성이 면사무소로 끌려가는 가운데 경찰과 군중 간에 충돌이 일어나 경찰의 칼에 찔려 죽었고, 함께 있던 윤혜연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근동의 주민과 종교계 등이 주축이 되어 사망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특히 면서기 이경응이 이은선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고 여겨 인근 이경응 집을 습격해 부쉈다. 다시 면사무소로 향한 시위대는 밤새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 3·1만세운동기념관 및 기념탑이 설치되어 있고, 이은선 순국 위치 등의 자료도 잘 정리돼 있다.

▲용유면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26일 용유면 주민 150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 용유도는 유인도 3개와 무인도 7개가 이루어져 마치 용이 헤엄을 치고 있는 것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1919년 3월23일과 24일 남북면에 사는 조종서·최봉학·문무현 등은 조명원의 집에 모여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혈성단이란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3월28일 거사할 것을 결의하고, 광목으로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조종서 등 4명이 분담해 '조선독립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는 취지의 격문 80여통을 작성해 마을에 돌렸다.
3월28일 4명의 주도자와 각 지역의 선봉인 윤치방·김윤배·윤보신·유웅렬·구길서·오기섭이 관청리 면사무소 앞에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자 주민 150여명이 호응해 앞서 만들어 두었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로 조명원 등 11명은 체포돼, 조명원은 징역 2년, 조종서는 징역 1년 8월, 최봉학·문무현은 징역 1년 6월, 윤치방·김윤배·윤보신·유웅렬·구길서·오기섭은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 차후 개발로 도로의 확장과 건물 신축으로 당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념표석 설치가 시급하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사진제공=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