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을 양력으로 못박은 '시민의 날' 옳을까
▲ 인천의 상징물에 대한 재론의 의견이 분분하다. 해양 인천에 걸맞고, 다양성을 포용하고 진취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상징물로 바꿔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에 음력을 양력으로 잘못 차용한 인천시민의 날을 비롯해 전근대적인 인천 시민의 노래 역시 조정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사진제공=인천시

 

▲ 팔미도등대

 

 

음력 1413년 10월15일 근거로 지정
"문제 없다" vs "바로 잡아야" 의견차
타지역은 '음력오류잡기' 관심높아져



바다는 인천의 젖줄이고, 생명이다. 인천의 역사에 바다는 도시의 근간이 됐다. 하지만 바다를 통해 세계로 뻗겠다는 인천의 꿈은 인천 어느 곳에도 찾을 수 없다. 이에 우리나라 3대 도시를 넘어 세계 속에 주목 받는 인천의 이미지를 높이고, 300만 인천의 역사성과 미래 지향성을 확립하기 위해 인천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시민의 날과 시민의 노래, 각종 상징물 등을 시대에 걸맞게 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0월15일 시민의 날
'10월15일 인천시민의 날은 옳을까'.
인천시는 지난 15일 54돌 인천시민의 날을 열었다. 인천도호부제가 봉행됐고, 박남춘 시장은 시민의 날을 맞아 인천의 나아갈 길을 밝혔다.
인천시민의 날은 '인천광역시민의 날 조례' 제2조의 "인천광역시민의날은 10월15일로 한다"를 기준으로 한다. 이 조례의 제1조는 "향토의 유서 깊은 날을 택하여 시민의 날로 정함으로써 선현들의 치적과 공로를 추모하고 시민의 친목단합을 도모하여 애향심을 고취시켜 향토발전에 이바지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했다.
문제는 인천시민의 날이 음력일을 양력일로 못박아 사용하는데 있다.
인천시민의 날이 10월15일로 정해진 것은 1993년이다. 당시 인천시사편찬위원회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언급된 1413년 10월15일을 인천시민의 날 지정의 근거로 삼았다. 양력을 기준삼은 갑오개혁 이후부터 음력 1413년 10월15일과 인천시민의 날인 10월15일은 별개의 날이지만, '편하자'는 목표로 정했다.
반면 인천과 같은 도시명 유래를 갖는 강원도 춘천시는 지난 2003년 강원향토문화연구회 자문을 통해 이날을 양력으로 바꿔 11월8일을 시민의 날로 정했다.
강옥엽 인천시사편찬위원은 "인천시민의 날이 제정된 당시 시사편찬위원들이 음력을 기준으로 할 경우 매년 날짜가 변하는 것을 염려해 음력 1413년 10월15일을 그대로 사용한 것 같다"며 "각종 행사가 많고 날씨가 좋은 10월에 인천시민의 날을 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음력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한 타 지역의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경남 진주시의회 시정질문에서는 "진주대첩 승전일은 1592년 음력 10월10일이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1월13일이다"며 "진주대첩은 양력 10월10일이 아니라 음력 10월10일이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1월13일'이 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은 "우리나라 기념일이 음력을 양력으로 바꿔 사용하는 만큼 인천시민의 날 또한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며 "1582년 이후를 기준으로 한 율리우스역과 그레고리우스역의 변화 또한 인천시민의 날 변경에 반드시 작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인천시민의 날은 인천항 개항(1883년 6월)을 기념해 6월1일을, 1974년 인천항 갑문 준공일인 5월10일을, 1981년 7월1일 인천직할시 승격을 시민의 날로 기념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市상징물 '팔미도등대' 시화 '동백꽃'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인천의 바다, 잊지 말자
대한민국 관문도시 인천, 모두가 동의한다. 이는 곧 대한민국 해양사가 인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인천을 통해 해양대국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에 대해 시민들은 반신반의하고 있다.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우리나라 바다 관련 역사 대부분 인천서 첫걸음을 내딛었다. 더 멀리 비류가 미추홀을 세웠던 인천의 이민 역사도 어찌보면 해양도시 인천의 포용정신에 바탕을 둔 역사적 출발점이다.
개항 후 인천에서는 '우리'의 손으로 직접 팔미도 등대가 놓였다. 비록 외세에 개항을 당했지만, 개항의 빛은 우리가 펼치겠다는 의지였다.
근대식 세관은 제물포에서 열었고 최초 해군사관학교인 '조선수사해방 학당'이 강화도에서 꿈을 펼쳤다. 대한제국의 희망 양무호가 인천에서 첫 고동소리를 울렸고, 이를 이끈 국내 첫 함장은 인천 사람 신순성이다.
바다 인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와이 이민의 시작이요, 국내 최초 수족관과 해수욕장이 문을 연 곳은 인천이다. 최초의 천일염 산지 주안과 무역상인 순신창상회, 동양 최대 갑분이 놓인 인천항 독도 주목해야 한다. 광복 후 정부가 최초로 인천에 국립해양대학교를 설립했고, 1974년 우리나라 최초로 컨테이너 부두가 인천에 놓였다는 것도 자랑이다.
지금도 인천은 해양에서 지역 경제의 30%를 기대고 있다.
아쉽게 인천에는 해양도시 상징물이 없다. 그만큼 인천이 바다를 잊고 살았고, 바다가 소홀해지며 '해양 도시 인천'은 멀어졌다. 그 틈을 타 지역이 비집고 들어가는 상황이다.
인천이 해양을 놓치지 않는다는 의지가 해양경찰청의 부활이고,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의 설립이다. 경기만을 인천만으로 바꿔, 인천해양주권 바로 세우기 작업도 필요하다.
해양도시 인천의 상징물이 점박이 물범이 맞을까. 아님 팔미도 등대로 교체해야 할까. 팔미도 등대는 개항의 빛을 밝혔고, 6·25 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열쇠가 된 곳이다. 팔미도 등대 점등일은 6월1일이다. 인천시민의 날과 인천의 상징물을 팔미도에서 찾는 것도 염두해야 한다.

▲인천의 기타 상징물은 어떨까
지난 2016년 인천시는 1955년 12월23일 제정된 '인천 시민의 노래'의 노랫말 변경에 나섰다. 현 300만 인천의 이미지와 부적합한 여러 부분 때문이다. 예로 1절 '한양길 구비구비'와 3절 '하늘을 휘여덮는 공장 연기' 등이 인천시민의 자긍심과 애향심에 맞지 않다는 평가 때문이다. 이 가사대로라면 인천은 여전히 한양에 복속돼 있고, 회색빛 공장 굴뚝에 잠식돼 있다. 아직 가사 교체는 미완이다.
이 뿐 아니라 인천시 상징조례가 정한 인천의 나무(시목)인 '목백합'과 시조인 '두루미', 시화 '장미' 역시 인천의 정체성과 연관이 있는지 의문이 들지만, 어느 곳도 뚜렷한 답을 주지 못한다.
인천시에 따르면 지난 1982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된 후 타 지역 사례에 맞춰 시목, 시조, 시화를 정했다. 하지만, 왜 시목이 목백합이고, 시조는 두루미이며, 시화가 장미인지는 모른다. 그저 36년전 채택 됐으니 써야 하고, 2년 전 인천 상징물을 점박이 물범으로 정할 때 시민 여론을 수렴할 당시 무리가 없었던 만큼 지금도 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인천과 목백합의 관계는 뭘까. 외국이 원산지이니 목백합이 시목으로 지정됐다면 우리나라 유입 역사가 확실한 국내 현존 최장수인 플라타너스와 아카시아 나무를 결정하는 것은 어떨까. 인천의 옛 지명에 남은 학익동·문학동·청학동·선학동의 '학'을 해양 인천을 나타내고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괭이갈매기'로 시조를 변경해보는 것은 무릴까. 이밖에 왜 인천의 꽃이 장미가 됐는지 불분명한 이유 말고, 대청도의 천연기념물 제66호인 동백꽃이 낫지 않나.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