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인천서예협회 고문·시인

 


입추와 처서도 지났는데 수그러들지 않는 더위는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다.

8월의 첫 주말 강원도 만해마을에는 전국 시인들이 모이는 행사로 들썩이고, 인천에선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느 한 곳을 가야 하는데, 올해는 무언가 심드렁해 포기하고 말았다.

해외에 사는 손주가 온 영향도 있었지만, 손주와 나를 달래기 위해 부지런하게 발길을 옮긴 곳이 있었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샤갈, 러브 엔 라이프'전이다.

내 발길을 돌리게 한 결정적 까닭이 있다.

직장이 서울에 있을 때 월급날이면 순례하듯 돌아보는 헌책방에서 보는 화가들의 그림(도록), 그중에서도 샤갈의 그림에 아는 것은 없었지만 빠졌다고 해야 할까.

무언가 나를 한동안 잡아끄는 힘에 빨려들어 갔었던 게 첫 번째 이유다.

하나 더 있다면 같은 직장에 근무했던 시인 김영태를 비롯해 샤갈의 그림을 소재로 한 '유태인이 사는 마을의 겨울'과 1987년에 펴낸 이승훈 시인의 '시집 샤갈'을 읽고 '시 속에 그림, 그림 속에 시'를 찾아간 것이다.

물론 손주의 사랑과 천사를 일러주기 위함도 있었다.

여인, 그리고 염소와 소 등 순박한 그림만 그리는 작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예고 없이 가슴을 훅 치고 끌어들이는 그림은 샤갈 (1887~1985)의 자서전 '나의 인생'에 수록된 삽화 '아버지'이다.

아버지로서 소임을 다해가는 사랑이 넘치는 모습에 나를 뒤돌아보며 내 아들, 또 그의 아들을 생각하게 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누구냐고 질문하면 마뭇거림 없이 '샤갈'이라고 답하는 이유는 '러브 엔 라이프'전(展)에 있었다.

모여드는 관객도 관객이지만 러시아 출신 유대인 샤갈과 그의 딸, 세계 각지 후원자들이 기증한 작품 중 엄선한 회화, 그리고 판화, 삽화, 태피스트리, 스테인글라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150여 점이 장관을 이루었다.

더욱이 아시아에서 처음 선보이는 이스라엘 국립미술관 소장품이라고 한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보여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들에게 시원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전시가 바로 샤갈전이다.

의문부호를 달 사람은 좀 있겠지만, 삶과 예술에 쏟았던 샤갈의 사랑이 분명 이곳에 있었다.

예술과 삶에서 진정한 의미의 색깔은 단 한 가지 '가족사랑'이다.

자연과 문학, 신과 인류, 태어난 고향, 가난한 유대인으로서 굴곡진 삶을 살았던 샤갈이다.

색채의 화가뿐만 아니라 삶과 예술이 접합된 주제를 잘 풀어내는 이야기의 화가이기도 했다.

연작 '여인들'에서 아내 벨라 로젠펠드(Bella Rosenfeld)에 대해 '꽃이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샤갈은 여겼다.

샤갈은 언제나 꽃을 함께 그려 넣으며 '사랑의 색'을 표현했으며,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림 속에 우(愚)가 있다고 할 혹자가 나올지 모르나 샤갈의 머릿속에는 분명 살아 있는 천사가 존재했다.

1929년 샤갈의 나이 42세에 피카소와 교우하며 한 말을 빌리자면 "그림을 그릴 때 샤갈은 깨어 있는지 잠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데, 분명한 것은 그의 머리 어딘가에는 반드시 천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샤갈 그림 속에 천사가 살고 있었다.

손주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예루살렘 하다사 병원의 스테인글라스 작품 '성서'다.

창문 12개에 야곱의 후손, 열두 지파(支派)를 묘사한 작품에서다. 말, 물고기, 나귀 등 동물들로 특징을 잘 나타냈다. 작품 속 동물을 찾으며 나눈 손주와의 교감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채색 화가다운 그림 속 동물이 있어서 좋은 이야기인데, 샤갈의 순수가 창문을 통해 어둠 속으로 쏟아졌다.

샤갈전을 통해 나타난 희망의 메시지는 현대사회에서 어려운 상황을 안고 살아가는 군중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준다.

돌아오는 길, 손주는 천사처럼 잠에 빠져 있었다.

/김학균 인천서예협회 고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