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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바라기] '한반도 운전자론'과 고려의 다원외교
[세상바라기] '한반도 운전자론'과 고려의 다원외교
  • 김진국
  • 승인 2018.03.20 00:05
  • 수정 2018.03.21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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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논설위원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등 한반도가 평화의 땅으로 가고 있는 것은 정말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자칫 작은 변수라도 돌출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올 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우려가 아니라 현실이다. 남북 관계를 둘러싼 국제적 환경엔 미국은 물론 한·미·일 공조의 균열을 우려하며 소심하게 끼어드는 일본, 조용히 지켜보는 중국과 러시아의 불안한 방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올해로 '건국 1100주년'을 맞는 '고려의 외교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는 한마디로 여러 나라와 외교를 하되 결정적인 순간엔 실리를 취하는 '다원적 외교' '등거리 외교'를 매우 전략적으로 실행한 국가였다. 고려는 거란이 멸망하는 12세기 초반까지 송·거란과 외교를 했으며 이후엔 금·송과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자 고려는 원·송과 다원적 외교관계를 형성했다. 고려 말인 14세기 후반엔 명나라가 등장하며 고려는 원·명의 각축 속에서 외교를 전개한다. 고려왕조는 이처럼 다원적 대외질서 속에서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한 축을 이루었으며 당시 동아시아 관계는 고려 역사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0세기 고려는 송과 요(거란), 금(여진)에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송나라는 같은 유교문화권 농경국가 고려를 연합해야 할 상대로 생각했다. 거란·여진과 같은 호족세력의 팽창을 저지하고 중원을 지키기 위해선 고려가 필요했던 것이다. 반면 거란과 금의 생각은 후방지역에 있는 고려와 송나라 관계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고려는 이런 3국의 외교적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어느 한쪽과 일방적 관계를 맺기보다는 고려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을 모색하며 외교전략을 펴나갔다. 고려외교의 핵심은 '영토와 문화적 실리의 추구'였다.

송나라는 985년 "거란을 공격하겠다, 원병을 보내달라"며 '한국화(韓國華)'란 사신을 고려에 보낸다. 이때 거란은 여진을 정벌하고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 중류에 세운 '정안국'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고려는 거란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송의 원병요청을 거절한다.
10세기초 당이 멸망하고 중국 대륙이 혼란한 틈을 타 북방에서 세를 키운 거란은 중국을 통일한 송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앞서 993년 고려를 침공한다. 거란의 대장군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1차 침입을 감행한다. 거란의 속셈은 사전에 고려를 견제해 장차 송과의 전쟁에서 군사·외교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것이었다.

고려 조정의 의견은 "싸우자" "안된다" 둘로 나뉘었다. 이때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을 만나 거란의 목적이 송과 고려의 관계를 차단하려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소손녕에게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고려에서 거란으로 가려는 길목에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어 어려움이 많다"며 "고려가 압록강 유역의 영토를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켜 줄 것"을 요청한다. 이때 거란이 수락하며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정상화됐고 고려는 압록강 유역 280리 지역까지 얻어 강동 6주를 설치한다. 서희가 유능한 외교전략가였고 '서희의 담판'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로 평가되는 이유다.
고려의 외교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거란과 외교를 튼 이상 송과는 외교를 단절해야 했다. 고려는 이때 송에 사신을 보내 거란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통보하며 원병을 요청한다. 송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고려였다. 명분을 만들기 위해 송이 수용하기 어려운 요청을 한 뒤 거절하자 곧바로 외교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치밀하고 전략적인 외교술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4강에 둘러싸여 살아가야 하는 것은 지정학적 운명이다. 문 대통령은 지금까지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한국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한반도 운전자론'에 따라 북한과 주변 4강 중재외교를 성공적으로 펼쳐왔다. 남은 과제는 3차 남북 정상회담, 북미회담의 성공적 개최와 현 한반도 전개상황을 바라보는 4강 주변국들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판단이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독일 베를린에서 밝힌 북한 붕괴·흡수통일을 배제한 평화 추구,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 비핵화 추구, 남북합의 법제화 및 종전 선언과 관련국이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남북 철도 연결, 남·북·러 가스관 연결 등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정치·군사적 상황과 분리된 비정치적 교류협력 지속 등 '한반도의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한 5대 정책 방향'이 잘 실현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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