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이 시는 1949년에 간행된 조병화의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에 수록된 시이다. 최근 거닐었던 바다 기슭에서 1940년대 시인이 걸었던 바다를 떠올렸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바다인가 보다. "잊어버리자고" 걸어보던 날이 하루 가고 이틀 가고 사흘이 지나도 잊히질 않아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 바다에 다시 선다. "잊어버리자고" 다시 바다 기슭을 걸어 보는 것이다. 바다는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잊어버리자고 가는 듯하지만 사실은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끊임없이 다짐하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누군가를 마음껏 생각하기 위해 바다를 걸어 보는 것이다.

온종일 잊어버리기 위해 기억한다. 잊어버리기 위해라고 애써 생각해보지만 "잊어버리자고" 생각하면 할수록 기억은 더욱 선명할 뿐이다.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바다를 기억한다. 바다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권경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