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女, 삶의 마지막 밤에 절실한 소통을 했을까
▲ 엄마 '델마'역의 배우 백재이(왼쪽)와 딸 '제시'를 연기한 이미나가 나란히 앉아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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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 누구보다 많은 얘기를 나누고 많은 걸 공유할 수 있는 관계지만 틀어지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수 있는 그런 관계,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가 바로 모녀(母女) 사이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란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 소중함을 잊고 산다. 마치 공기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일상 속에 묻어두 듯.

지난 19일 오후 신포동에 위치한 다락소극장에서 올해 첫 연극 '잘자요, 엄마'가 모습을 공개했다. 지난해 12월 말에도 올렸던 작품이지만 3일이라는 짧은 공연 기간으로 미처 보지 못했던 관객들의 바람으로 다시 한 번 무대에 오르게 됐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오후, 어김없이 거실에는 TV쇼가 흘러나오고 엄마 '델마'(백재이)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딸 '제시'(이미나) 역시 늘 그랬듯 엄마의 말소리를 친구삼아 집안을 청소한다. 간질병을 앓고 있는 제시는 남편과 이혼한 뒤 엄마와 살며 떼려야 뗄 수 없는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동반자다.

우발적인 발작 때문에 제시는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도 못하고 운전도 할 수 없다. 혼자서 밖에 나가는 것은 물론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극히도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비참함은 제시를 짓눌러왔는 지 모른다. 늘 그림자처럼 곁에 있던 엄마도 모르게 서서히.
"엄마, 나 오늘 죽으려고", "죽는다고?", "날 쏜다고요. 2시간 안에."

제시는 지독하게도 잔인한 말을 툭 내뱉고는 자신이 죽고 나서 혼자 남겨질 엄마를 위해 메모를 써두며 이것저것을 정리를 한다. 델마는 어린 아이 달래듯 설득하기도, 호되게 혼내기도 하며 그를 말리지만 제시는 야속하게도 장난 섞인 웃음을 보이며 더욱더 강경한 태도로 죽음의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둘은 대화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회상하고,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들을 쏟아놓는다. 빠르고 긴장감 있는 둘의 호흡과 억양은 관객들을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든다. 점점 고조되는 대화 속에 남편과 친구, 아들 등 주위 사람의 이야기가 드러나는데,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러면서도 모녀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한 템포 천천히 쉬어가면서 지독한 일상으로 다시 들어가 빨래를 널고, 집안을 치우고, 코코아를 타 마시며 보는 이들을 안심시킨다.

담담하다가도 격해지고, 냉정해지다 어느 순간 감정이 폭발하는 엄마와 딸은 그동안 숨겨뒀던 가슴 속 이야기를 상처의 파편들로 날카롭게 쏟으며 서로의 가슴을 후벼 판다. 그렇게 수십 년 간 알 수 없었던 서로의 속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며 서로에게 한 발자국 다가간다. 안타깝게도 생의 마지막 날 밤에 말이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은 뒤로 하고 극은 예정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잘자요, 엄마"라며 방문을 굳게 닫은 제시는 단 한 번의 총성으로 엄마에게 영원한 안녕을 고한다.

"아가, 난 네가 내껀 줄 알았어"라는 델마의 대사에 모든 메시지가 집약돼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온 엄마와 그토록 고독했지만 내색하지 않던 딸.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갈등과 무언의 화해를 그리는 과정은 긴장이 풀어졌다 굳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관객들을 '쪼인다'.

'잘자요, 엄마'는 '딸의 자살을 앞둔 모녀의 마지막 밤'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로 출발하지만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삶'과 '소통'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파고든다. 제시가 간질을 겪어 삶의 어려움을 겪듯 사회를 살아가면서 누구나 하나 쯤 마음 속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을 꼬집으며 말이다.

1982년 미국 오프브로드웨이 레퍼토리 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다음해 희곡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1987년 국내에서 초연했다. 김용림, 윤석화, 나문희, 박정자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이 연극을 거쳐 갔으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가치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배우이자 다락 소극장 대표 백재이와 배우 이미나가 연기한 '잘자요, 엄마'는 또 다른 먹먹함과 여운을 선물한다. 이날 늦은 시간에도 불구 서울에서 온 대학생 문소현씨는 "단 둘이서 극을 이끌어가는 게 정말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나도 잘 왔다고 느낄 정도로 진한 여운이 남는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공연 소식을 듣고는 '동인천에도 소극장이 있었느냐'는 한 시민의 '웃픈' 한 마디를 싹 잠재우듯 말이다. 지난 7년간 묵묵히 20여 편을 무대에 올리며 지역과 호흡해 온 그들의 땀과 열정이 이번 작품을 통해 더욱더 빛을 발하길 바란다.

오는 2월11일까지 진행하며, 금요일 오후 9시, 토·일요일은 오후 4시에 공연한다. 인터파크와 엔티켓을 통해 예매하면 된다. 2만원, 032-777-1959

/글·사진 송유진 기자 uzin@incheonilbo.com


"두 여성이 풀어가는 이야기 … 다양한 감정 느끼는 시간 될 것"

이미나 연출 겸 배우

"두 명의 여성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실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번 '잘자요, 엄마'의 연출을 맡은 동시에 딸 '제시'를 연기한 이미나(42) 연출은 첫 공연을 마치고는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프로 극단에선 처음 맡은 연출이기에 작품에 대한 애정과 쏟아 부은 정성이 더욱더 컸기 때문이다.

26살에 데뷔해 프리랜서로 무대에 오르다 극단 '떼아뜨르 다락'에서 4년째 연기하고 있는 이 연출은 '잘자요, 엄마'를 만난 것을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 대본을 읽어본 여성이라면 배우로서 또 연출로서 그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며 "두 캐릭터가 빚는 갈등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내내 고민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빠져들었다"며 연출 계기를 밝혔다.

연출과 배우를 모두 맡았기에 욕심만큼이나 어려움도 상당했다. 그는 "연출로서 머릿속으로 그렸던 장면이 막상 내가 무대에 섰을 때 그대로 실현되지 않을 뿐더러 내가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답답함도 컸다"고 했다. 이어 "드러내고자 했던 감정이나 이야기를 관객들이 어떻게 보는 지 파악하기 어려워 크고 작은 한계도 절실히 느꼈다"고 덧붙였다.

이 연출은 줄거리 상 조금은 잔인할 수도 있는 점을 감안해 세세한 배려를 담은 장치들도 구상했다. 심지어 누울 수 있는 파격적인 좌석 배치와 중간 중간에 둔 소소한 다과들이 그렇다. 어떤 날은 빵과 맥주도 준비해 관객들이 편히 즐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그는 "90분 동안 잔혹함과 긴장의 연속을 느끼시겠지만 몸은 최대한 안정된 상태에서 극을 즐기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송유진 기자 uzi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