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 인천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
"국민의 삶을 바꾸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습니다."
무술년 첫날, 문 대통령은 국민 삶의 질 개선을 최우선 국정 목표로 삼겠다는 신년 메시지를 남겼다. 그 반가운 메시지 뒤로, 가계부채 증가와 자녀양육으로 인해 30·40대 빈곤율이 동반상승했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겹쳐졌다. 지난 3월말 기준 우리나라 가구의 평균 부채액은 7022만원으로 1년 전보다 4.5% 늘었다. 30대 가구주의 평균 부채 증가율이 지난해 대비 약 16%로 가장 높았고, 40대 가구주의 평균 부채는 8533만원으로 모든 연령대에 비해 제일 높게 나타났다.

이미 가계부채 규모가 1400조원을 넘어섰고, 현재까지도 매달 10조원 정도 늘고 있는 현실에서 금융기관에 빚을 진 10명 중 1명이 자신의 5년치 소득을 꼬박 저축해도 부채 상환이 어렵다는 현실은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는 진부한 주제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이처럼 소득 대비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고, 저소득·저신용층·다중채무자 등 취약계층의 채무부담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만연돼 있는 현실 앞에 삶의 질 개선의 첫 번째 시작이 어디부터일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금융당국은 우리 경제의 뇌관이라는 가계부채 문제 해결을 위한 첫 시도로 지난해 여름부터 금융행복기금과 금융공공기관이 보유한 회수불가능한 장기·소액·연체 채권을 정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소위 죽은 채권이라고 불리는'소멸시효 완성 채권'을 소각함으로써 오랫동안 가혹한 채권 추심에 시달린 취약계층의 빚의 굴레를 벗겨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장기 악성 채무에 시달린 취약계층인 최대 214만명의 마지막 재기의 기회를 마치 100% 빚 탕감의 요행을 바라며 도덕적 해이에 빠진 상습 연체자 양성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또한 개인이 받은 대출을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해결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같이 도덕적 해이와 성실하게 빚을 갚고 있는 채무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는 날선 비판 속에는 내핍 생활을 사회적으로 강요받고 있는 채무자들의 인권보장도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방어권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삐닥한' 엄중함이 도사리고 있다.

대기업의 부실이나 부도를 막기 위해 투입하는 수십 수백조의 공적자금에 대해서는 당연한 정부의 역할이라며 눈을 감고, 수십 년간 가혹한 추심을 견뎌 온 214만명을 위한 단 한 번의 패자부활전조차 용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과연 형평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 1997년 이후 지금껏 정부가 부실기업에 투자한 공적자금 규모는 약 168조원이며, 지금껏 회수하지 못한 자금 규모는 약 55조원에 이르고 있다. 소수의 기업을 위해 투입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적 자금은 눈 감아 줄 수 있고, 200만명도 넘는 취약계층의 아픔에는 유난을 떨며 예의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2011년 미국 '월가 점령시위'(Occupy Wall Street)를 촉발시킨 근본적 원인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와 이후 저성장에 따른 미진한 고용 회복 등의 사회 전반적인 불만 증가가 주요 원인이었으나, 금융업계의 탐욕과 경제 불평등을 야기한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경고였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 금융위기 기간 중 대형금융회사들의 손실을 납세자가 상당부분 부담하는 현실에서 여전히 대규모 보너스를 지급하는 등 종전의 관행을 지속하는 금융사들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증가해 빚어진 사태였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서민들의 가계부채 상환 부담이 꾸준히 증가하는 상황 속에서 시중 은행들은 가계대출 목표이익률을 지속적으로 높여 가계부채 증가 현상에 기대 자신들의 수익을 높여온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죽은 채권임을 알면서도 소멸시효완성 채권을 사고팔아 법률지식·정보가 부족한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가혹한 추심을 일삼는 금융사와 대부업체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과연 누구의 도덕적 해이를 문제 삼는 것이 공정한 것인지 자명한 문제이다.
개인이 실패하거나 예기치 않게 불행해졌을 때 공동체가 나서 안전망을 제공해주고, 개인들의 불안과 공포를 경감하려는 적극성을 보일 때, 구성원들 간 유대와 사회적 결속이 더욱 견고해져 삶의 안정성을 갖게 된다. 그와 같은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이 결국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흔히 형평성을 주장하기 위해 인용되는 사회적 정의의 첫 번째 목표는 단지 다음 세대뿐 아니라 분명히 먼 미래까지도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말한 개릿 하딘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