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태 농협 안성교육원교수
미국 어느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남자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탑승했다. 차내에서 다른 승객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 아이들은 소란스럽게 계속 떠들고 뛰어다니며 짓궂은 장난을 쳤다. 아버지는 아이들의 무례한 장난을 만류할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거나 멍하니 천정만 쳐다보길 반복했다. 참다 못한 한 승객이 그 아버지에게 힐난하듯 아이들을 제지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맥 없이 대답한다. "예, 죄송합니다. 사실은 조금 전 아이들의 엄마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렇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골라서 편집하곤 한다. 내 생각만이 보편타당한 것도, 절대적인 것 또한 아니다. 섣불리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나 처지도 고려하여 좀 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상대가 왜 그러는지, 혹은 무슨 말 못할 사정은 없는지도 한 번쯤은 역지사지를 해보아야 한다. 쉽게 말해 그나마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양쪽 사정을 모두 들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듯, 상대의 처지를 알고 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수긍 못할 것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많은 경우 "아~, 그랬구나!"라 공감되는 상황이 얼마든지 있다.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는 감정이 곧 '공감(共感)'이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이미 본인이 답을 더 잘 알고 있다. 굳이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따지기보단 '나라도 그 상황이면 그랬을 거야', '당신보다 내가 더 화가 나네', 혹은 '난 항상 당신 편이야'라고 공감하는 마음이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하다. 상대 편에 서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도 바로 공감이다.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손을 잡아주는 것, 말이 아닌 행동이 가장 진실된 공감인 것이다.

직장 또한 다르지 않다. 리더는 혼자서 뭔가 열심히 떠들고 있지만 동료들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다. 상사는 주장만 하려 할 뿐, 귀 기울여 직원들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청산유수처럼 말하는 매끄러운 입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해 주는 큰 귀다. 이 시대의 위기도 공감과 소통의 부재(不在)와 무관하지 않다. 만사형통하는 소통을 위해 우리 모두 따뜻한 공감과 소통의 언어를 일상에서 실천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