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승용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   
지난해에 나온 영화 가운데 큰 관심을 받았지만 기대만큼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영화를 들라고 하면 단연 남한산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남한산성이 개봉될 때만 해도 몇 년 전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던 영화 명량(鳴梁)의 관객수를 뛰어넘을 것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관객이 400만명을 채 넘기지 못하여 아쉬움을 샀었다. 영화 명량이 임진왜란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감동적인 내용인 것에 비하여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순간을 다룬 점이 관객들의 외면을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영화에서도 잘 나타나 있지만, 청(淸)나라 군이 압록강을 넘어 닷새 만에 한양에 당도하자 인조(仁祖)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해야만 했다. 청(淸)과의 화친을 반대하던 김상헌(金尙憲)은 왕을 구하러 근왕병(勤王兵)이 전국에서 곧 모여 들면 싸움에 승산이 있을 것이라며 그토록 애타게 근왕병을 기다렸건만, 남한산성 근처까지 왔던 조선의 병사들이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몰살되는 장면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실제로 1592년 일어났던 임진왜란과 40여년 만인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은 조선에 처참한 역사의 교훈을 남겼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어찌 되었건 간에 외적을 우리 땅에서 물리친 전쟁이었다고 한다면, 병자호란 때에는 국왕의 굴욕적인 항복에 이어서 우리 백성들 약 50여만명이 포로로 끌려가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백성들과 천민들까지 전국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을 물리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면,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이 거의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 또한 달랐다.

임진왜란 당시 전란을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하였던 유성룡(柳成龍)은 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노비에게는 면천(免賤) 즉, 천한 신분을 면하게 해주자고 상소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조선시대 당시 병역의 의무가 없었던 천민들도 의병으로 나서게 되었고 이것이 조선을 왜란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 큰 몫을 하였다.

그렇지만 왜란이 끝나자 선조(宣祖)는 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이순신과 몇몇 의병이 얼마간의 역할을 하였지만, 미미하였을 뿐이고 자신이 의주(義州)까지 가서 명(明)나라 구원병을 불러 왔던 공이 컸다고 자평하였다. 그리고 정작 공훈을 받아야 할 의병 대장들은 이러저러한 죄목을 걸어 처벌하였고, 천민들에게도 공을 세우면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던 당초의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그러니 백성들이 나라에서 한 약속을 믿지 않게 되었고 40여년 만에 닥친 병란에서 기꺼이 나서 나라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의 백성들은 이제 나라를 위해서, 아니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의병을 일으켜 싸우는 일에 망설였고 그러는 사이에 전쟁은 굴욕적인 항복과 치욕적인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끝났다.

『논어』 안연편에서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올바른 정치의 조건이 무엇인지 여쭙자, 공자는 "백성들에게 믿음을 잃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民無信不立)"라고 하였다. 믿을 신(信)자는 사람 인(人)자와 말씀 언(言)자가 합하여진 글자이다. 즉 믿음이란 사람의 말부터 반드시 미더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치 사람의 말은 한 번 내뱉고 나면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특히 위정자의 한마디 한마디는 나라의 운명을 가름할 수 있다는 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