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경 인천시도서관발전진흥원 기획홍보팀장
어릴 적 내 집에는 계몽사에서 나온 자주색 하드커버의 50권짜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연식이 좀 되신 분들은 이 책을 기억하리라)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어머니는 당신이 어릴 적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것에 한풀이라도 하듯, 4명이나 되는 어린 자식들에게 책을 읽게 할 요량으로, 방문 판매원에게 전집을 구입하셨다.

어머니 마음을 다 헤아린 것은 아니었지만, 요즘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접하지 못하던 그 시절에 우리 자매들은 그 전집 제목에 음을 붙여가며 외울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처럼 컬러에 삽화가 포함되어 있는 책이 아닌,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쓰인 책이었다.

하지만 종이 인쇄 냄새가 좋았고, 하드커버로 된 책을 옆구리에 끼고 어슬렁거리는 것도 근사하게 느껴졌다. 이 멋진 책들이 서가에 꽂혀 우리 방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왠지 뿌듯했다.

이런 내가 사서가 된 것은 행운이었다. 책을 원 없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나는 책이 가득 꽂힌 서가 사이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한걸음씩 발을 옮기며 책등에 인쇄된 책 제목을 읽는다. 어린 시절 책 제목을 외우던 그 음을 따라서 말이다.

그러다 발견하게 되는 뜻밖의 책 때문에 새로운 작가를 만나게 된다. 책 속 구절 중 어느 한 문장은 오랫동안 마음 깊숙이 감동의 잔상으로 남아 삶의 풍요를 얻는다.

책을 읽게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거기엔 '계기'가 필요하다.


시민을 대상으로 한 북콘서트를 기획할 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작가나 공연팀을 섭외하려고 한다. 일정 부분의 비용 부담을 감수하면서 관객 모으기를 위한 수단으로 말이다.

어떤 때에는 "꼭 이래야 할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들이 책에 접근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그것도 그리 잘못된 방법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도서관과 책을 알리고 책을 읽게 하는'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합리화일 수 있다.

도서관은 신간도서를 입수하면 이를 별도의 서가에 비치하여 안내한다. 시기별 이슈에 따른 도서 전시를 하고 권장 및 추천도서 목록을 배포하여 이용자들에게 책에 접근하도록 유도한다.

이야기 할머니나 사서가 읽어주는 책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독서동아리를 구성하여 함께 책을 읽고 나누는 시간도 갖는다.

또한 글을 읽기 보다는 영상을 보는 것에 익숙한 10대와 20대를 위해 모바일을 통해 책에 접근하는 전자책 서비스도 제공한다. 이 모든 것이 책을 읽게 하려는 '계기' 마련의 방법들이다.

실제로 '국민독서실태조사(2015년)'에 따르면 성인의 62.5%, 학생의 54.0%가 독서나 도서 대출을 위해 공공도서관을 방문했고, 도서관의 문화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을 조사해보니 성인이 2.9%, 학생이 1.3%에 불과했다.

공공도서관은 책이 있고 책을 만나기 위한 공간이며, 이용자 역시 그렇게 공공도서관을 이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게 하는 노력인 '계기'는 중요한 도서관의 역할 중 하나이다.

공공도서관은 오늘도 책을 읽게 하는'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눈빛을 황홀하게 하는 멋진 책 표지가, 우연히 맞닥뜨린 책 제목이, 관중 속에서 듣게 된 작가의 한마디가, 독서동아리 회원들과의 나눔이, 그 어떤 것이든 누군가에게 책을 읽는 계기를 선사할 수 있다.

어린 꼬마가 줄줄 외우던 책 제목 때문에 사서도 되고 책을 권하는 사람으로 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