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정신적 지주 고려극장, 한민족 긍지 안겨주다
▲ 홍범도 연극 공연 모습
▲ 고려극장 창립 70주년 공연
▲ 고려극장 크질오르다 시절 전경.
▲ 고려극장 초창기 공연
▲ 김조야 고려극장 대표.
▲ 고려극장 전경.
1932년 블라디보스톡 원동마을서 구성

전세계 가장 오랜 역사 한민족 공연단체

카자흐 정부 배려로 전용극장 시대열어

선배 배우들 노고 … 아카데미 칭호 영광

연해주의 고려인이 20만명이 넘던 1932년. 블라디보스톡의 고려인 집단거주지인 원동마을에는 한글로 된 신문과 잡지는 물론 고려인들로 구성된 공연단체가 생겨났다.

지금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고려극장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고려극장은 1937년 고려인의 강제이주와 함께 중앙아시아로 이주됐다. 첫 정착지는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였다. 초기 대표작품은 '춘향전'으로 이 연극에 우수한 배우들이 전원 출연했다. 당시에 이러한 내용을 보도한 신문인 '레닌기치'에 의하면 연극 '춘향전'을 400회나 관람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가슴에 한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줬지만 극장은 실로 30년간 부침이 심했다. 크질오르다에서 우슈토베로, 다시 크질오르다로 이전했다가 현재의 알마티에 정착한 것은 1968년이다.

취재팀은 알마티 시내에 위치한 고려극장을 찾았다. 건물들 사이로 한복을 입은 여인이 장고춤을 추는 커다란 벽화가 보인다. 한 눈에 보아도 고려극장임을 알 수 있다. 극장 안은 지난 몇 년간 공연했던 포스터들이 한 면을 채우고 있고, 넓은 연습실은 배우들의 리허설로 훈훈하다.

"우리 극장은 85년의 역사를 지닌 최초의 해외 극단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한민족 공연단체입니다" 탐사팀을 반갑게 맞이한 고려극장 대표 김조야씨가 고려극장의 역사에 대해 알려준다.
"고려극장은 유일한 아카데믹 극장입니다. 1968년부터 국립극장이 됐고, 카자흐스탄 정부의 배려로 2002년에 현재의 전용극장을 갖게 됐습니다."

김 대표는 고려문화협회에서 20여 년간 고려인과 관련된 문화를 부활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 결과, 카자흐스탄 정부에서도 극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됐고, 고려인의 역사, 문화, 풍습 등을 알려주는 원천장소로 지원받게 됐다고 한다. 김 대표의 부단한 노력이 오늘의 고려극장을 보다 우뚝 서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겸손하게 말한다.

"고려극장이 아카데미 칭호를 받은 것은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선배 배우들의 노고의 결실이며, 오늘의 후배들도 이를 지켜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고려극장은 모든 공연을 한국어로 한다. 이는 설립초기부터 변함이 없다. 관람객을 위해서 러시아어와 카자흐어로 동시통역한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한국어로 하는 공연이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한국어를 공부하는지 궁금했다. "별도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모든 대사를 그냥 통째로 외우는거죠"

고려극장의 단원은 96명이고 배우는 50명이다. 이들의 한 해 공연 횟수는 평균 80회다. 일주일에 한 편 이상을 공연하는 강행군이다. 하지만 배우와 단원들은 힘들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 고려인의 문화와 정체성을 널리 알리려는 열정뿐이다.

고려극장은 올해 창립 85주년이다. 11월에는 커다란 행사가 연이어 계획돼 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국립극장으로서의 우리 극장의 중요성 인식하고 국가적인 시스템에 의해서 2020년까지 행사지원 계획을 마련해놓았습니다." 김 대표의 고려극장 사랑은 창립 100주년을 향하고 있었다.

한국정부에 대한 고려인들의 마음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외에 있는 고려인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정치와 경제도 잘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고려인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고려극장은 고난과 결핍의 힘든 시절을 이겨내고 수많은 배우와 가수, 극작가와 작곡가를 배출했다. 조국과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에서 타민족들과 조화로운 삶을 터전을 마련하는 한편,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데 누구보다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고려극장의 역사는 바로 고려인의 역사이자, 카자흐스탄 국민과 정부가 고려인에게 베풀어준 우호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가 나서서 이들이 가꾸어온 우호의 역사를 더욱 발전시켜야만 한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특별취재팀
/카자흐스탄(알마티)·키르기스스탄(비슈케크)=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

-------------------------------------------------------------------
인터뷰/ 최발레리 고려인문화협회 회장

최고 노동영웅 고려인, 정계진출 결실"

키르기스스탄 인구 1%·활동량은 50% … 한국인들 관심을"

193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이주한 고려인은 약 400여명이다. 모든 고려인들이 힘든 생활을 했지만 키르기스스탄으로 온 고려인들의 고통은 더 심했다. 낯선 타향에서 적은 인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충이 배가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2만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인 비슈케크에서 만난 고려인문화협회 최 발레리(62세) 회장은 "고려인수는 전체인구 중 1%도 안 되지만, 활동량만 보면 전체인구의 5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고려인들이 각계각층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고려인들의 활동은 초기 정착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다.

"1헥터당 파 생산량이 5t이었을 때, 고려인들은 50t에서 70t을 생산했습니다. 현지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그때부터 고려인들은 최고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우즈벡의 유라시아민족협회 회장도 고려인을 일컬어, "우리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준 형제"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이러한 고려인들의 노력은 키르기스스탄의 정계까지도 진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대법원장을 비롯해 농업건설부장관, 국방부장관 및 안보 제1부위원장 등으로 진출했다.

고려인문화협회는 올해로 28주년이 됐다. 다른 국가에 비해 적은 인원이지만 성과는 어느 지역 못지않다. 신문을 만들고 국가가 인정하는 음악당을 세웠다. 5곳에 노인당을 건설했고, 모든 지역에 고려인문화협회 지회를 설립했다.

최 회장은 많은 활동과 성과를 내었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에 필요한 예산이 부족하다. 재외동포재단에서 1헥터의 온실을 지원해줬다. 하지만 이곳에서 생산한 농작물의 수익으로는 고려인 자녀들의 장학금지원 사업 정도만 가능하다.

"이곳에는 32개의 소수민족협회와 회원이 있습니다. 고려인협회는 32개 협회의 회원들이 인정하는 리더 그룹입니다. 앞으로도 고려인협회가 앞서나갈 수 있도록 한국과 한국인들도 관심과 지원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