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쓴 글씨 26점이 보물 제569호로 지정돼 있다.

인장(도장) 대신 넷째 손가락을 자른 왼손에 먹을 묻혀 찍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는 내용 등인데, 경기도에는 용인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에 1점이 보관돼 있다.

해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안중근. 배와 가슴에 검은점 일곱개가 있어 자(字)를 응칠이라 하였다.

평생 친구와 의를 맺는 것,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총으로 사냥하는 것, 날쌘 말을 타고 달리는 것 4가지를 좋아했다.

청년 안중근은 의협심이 강했다.

아내와 재산을 빼앗기고 흠씬 두들겨 맞기까지 한 친구를 위해 서울에 같이 올라간다.

하지만 오히려 늙은 어머니를 구타했다는 상대방의 무고로 친구만 감옥에 가게 되고, 출소 후 친구는 상대방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게 된다.

을사조약(1905년) 후에는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힘썼다.

하지만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전투에 뛰어들고, 안중근의 의병부대는 함경북도 일대에서 일본군에 승리한다.

그러나 만국공법과 천주교도의 박애정신으로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총포까지 돌려주며 풀어주자 의병대원들의 불만이 폭발한다.

설상가상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게 되고, 안중근은 12일간 두끼밖에 먹지 못하며 장맛비 속 산길을 야행해 두만강을 넘는다.

하지만 추위, 배고픔, 질병에 지친 그를 친구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이후 안중근은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을 3년 이내에 암살하는 것이 목표였다.

성공하지 못하면 자살로써 국민에게 속죄하겠다며 왼손 네번째 손가락 한마디를 자른 것이다.

안중근은 체포된 후에도 자신 외에 단지동맹 가담자가 11명 더 있다는 말만 하고, 끝까지 동지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아 지금까지도 단지동맹의 명단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