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숙은 시계를 보며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말했다. 손씨는 큰아들 내외와 손녀가 늙은이 해소기침 소리에 단잠을 깰까 봐 아들 내외 방에서 제일 먼 내민대(베란다)까지 나와 진정시키고 있었는데, 군 인민병원 외과과장으로 근무하는 맏며느리한테 들켜버린 것이다. 그니는 만사가 다 틀린 듯 거실 나들문(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구멍탄 보시려구요. 제가 볼 테니까 그냥 계세요.』

 아파트 나들문을 열고 정남숙은 밖으로 나갔다. 5월이라고 해도 새벽바람은 아직도 차가웠다. 그녀는 버릇처럼 손등을 비비면서 구멍탄 더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기거하는 사회안전부(경찰서) 아파트는 나들문 바깥으로 일자형 통로가 길게 나 있는 외랑식(外廊式) 아파트였다. 통로는 집집마다 구멍탄을 쌓아두고 있어서 비좁고 음침했다. 그니는 구멍탄 더미 옆에 세워둔 집게를 찾아들고 구멍탄 화덕 뚜껑을 열었다. 시어머니 손씨가 어젯밤 잠자리에 들 때 갈아넣은 구멍탄은 그새 다 타서 위에까지 불그죽죽한 흙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니는 수명이 다 되어 가는 구멍탄을 집게로 들어낸 뒤, 다 탄 밑엣탄을 집어냈다. 그리고 들어내 놓은 위엣탄을 밑으로 넣고 그 위에다 새로운 구멍탄을 얹어 구멍을 맞추었다.

 가슴을 콱 치는 듯한 가스 냄새와 시커먼 연기가 푹 솟구쳤다. 그녀는 얼른 열어놓은 화덕 뚜껑을 덮으며 맑은 공기부터 한 모금 삼켰다. 구멍탄을 갈아넣을 때마다 한번씩 맡아야 하는 이 가스 냄새는 정말 지겹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가스 냄새를 맡지 않고는 탄을 갈아넣을 수도 없고 구멍을 맞출 수도 없었다.

 은혜거리 밑에 새로 짓고 있는 현대식 아파트가 완성되면 그쪽으로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집에서 살림을 살아주시는 시어머니도 아침 저녁 이 독한 가스냄새를 맡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아파트는 인근 광산에서 생산되는 석탄과 조개탄을 태워서 증기를 만들고, 그 증기를 이용해 난방과 취사를 할 수 있게 한다니까 얼마나 살기에 편할 것인가.

 정남숙은 큰방과 시어머니 방으로 들어가는 구멍탄 화덕을 다 둘러본 뒤, 맑은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며 은혜거리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낙원군 내에서는 제일 높은 아파트단지라 낮에는 집에서도 골조가 올라가는 모습이 잘 보였는데 캄캄한 어둠이 시야를 막고 있는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아파트단지는 보이지 않았다. 냉냉한 하늘엔 쪽빗 같은 초생달이 걸려 있고, 어디선가 우우 하면서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창공을 울리고 있었다. 그니는 멀거니 새벽하늘을 바라보다 불빛이 보이는 은혜읍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캄캄한 꼭두새벽인데 저렇게 불을 밝히고 있는 곳은 필시 세대주 곽병룡 상좌가 복무하는 낙원군 사회안전부 신청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