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2층 벽돌집엔 '첫 도선사'가 살았다
▲ 인천시 중구 개항로 45번길 20 내동벽돌집은 1933년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인 유항렬씨가 지은 집이다. 지금 이 집엔 아들 재공 씨가 살고 있다. 일본식 주택인 내동벽돌집이 견고한 모습으로 서 있다.
▲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신포동은 여전히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 신포패션문화의거리 금강제화 앞에 설치한 대형트리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이 트리는 이달 말까지 계속 이 자리에서 반짝이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선사할 예정이다.
1933년 '유항렬'이 건축 … 다다미식 목조계단 집
정겹고 아름다운 거리 신포동엔 '트리' 반짝


촛불의 물결로 뒤덮인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그렇지만 신포동은 여전히 '메리 크리스마스' 빛깔로 반짝인다. 신포동 금강제화 앞 5거리. 한 가운데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의 전구들이 수백만 개의 촛불처럼 빛을 발한다.

이 정겹고 아름다운 거리, 어디에선가 '라스트 크리스마스'(Last Christmas)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쉰 세 살의 나이로 요절한 영국 팝가수 조지 마이클. 음악처럼, 불꽃같은 삶처럼, 그는 '라스트 크리스마스' 멜로디를 타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는 별이 되었지만, 그의 영혼은 오래도록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노래는 가수의 영혼이고, 책은 작가의 영혼이다. 모차르트와 토스토옙스키는 지금 없지만, 우린 여전히 '클라리넷 협주곡'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그들의 영혼을 조우한다.

신포동은 광복 이후부터 팝송이 오선지의 음표처럼 흐르는 거리였다. 인천상륙작전 뒤 UN군이 진주하면서 신포동엔 하나 둘씩 클럽(Club)이 들어섰다. 클럽들은 재즈, 블루스, 컨츄리, 록큰롤 등 다양한 빛깔의 음악을 들려주며 다국적군의 향수를 달래줬다. 신포동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언젠가 만났던 가수 송창식과 키보이스 리더 김홍탁씨는 신포동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대중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고백했었다. 지금도 신포동엔 '씨멘스클럽' 서너 개가 야광색 네온사인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중이다.

'신포패션문화의거리' 한 가운데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 26일부터다. 그 때 개막한 '인천크리스마스 트리문화축제'는 설 연휴인 오는 30일까지 계속된다.

신포동에서 만난 한 상인은 "트리가 설치된 뒤 신포동의 분위기가 한결 밝아져 오가는 시민들과 상인들이 좋아한다"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오래도록 즐기고 싶은 분들은 어둑어둑해질 무렵 신포동으로 오면 된다"고 웃음지었다.

신포동의 하늘에 은하수처럼 무늬진 무수한 전구들을 뒤로 하고 내동교회 방향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붉은 담벽안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 '내동벽돌집'(중구 개항로 45번길 20)이다. 인터폰벨을 누르자 조금 뒤 현관문이 열린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이 집 주인이신가요?"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1933년 이 자리에 내동벽돌집을 건축한 유항렬씨의 아들 재공씨다. 인자한 미소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저희 선친께서 지은 건데 지금은 제가 살고 있습니다. 1층에 난방을 해서 아주 따뜻해요." 오래된 집이라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지 않느냐는 물음에 집주인은 친절하게 답해줬다.

내동벽돌집을 지은 유항렬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다. 도선사는 항구를 드나드는 배의 뱃길을 안내하는 사람이다. 동경고등상선학교를 나온 그는 193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도선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앞서 그는 1933년 223㎡ 대지 위에 지상2층, 지하1층 건물을 짓는다. 다다미를 깐 일본식 방과 목조계단으로 이뤄진 일본식 집이었다. 집에 머물 때도 도선사의 시선은 늘 팔미도가 보이는 서쪽을 향해 있었다. 해가 잘 드는 남쪽이 아닌 서쪽으로 테라스를 낸 것도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배를 보기 위해서였다. 지금 도선사는 없지만, 우린 그의 영혼을 내동벽돌집으로 만난다.

고 신태범 박사는 인천일보에 연재했던 글에서 "유항렬 씨는 오랫동안 조선우선회사 평안환(인천~대련~상해 정기선)의 선장을 지냈으며 광복이 되자 인천항의 한 사람뿐인 도선사로서 공헌이 많았다. 그 이후에도 도선사협회를 중심으로 칠순이 넘도록 활동을 계속했다"며 "내동 벽돌집처럼 단단한 체구와 부지런한 성품을 지닌 유 씨는 당시 드물던 전문 직업인으로 대성하여 적지 않은 화제를 남겼다"고 회고한 바 있다. 유항렬 씨에 이어 우리나라 2대 도선사를 지낸 사람은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쓴 김중미 작가의 외할아버지인 김선덕씨다.

"컹! 컹! 컹!" 내동벽돌집 주인과 인사를 나눈 뒤 신포패션문화의거리로 내려오는데 건너편 집에서 큰 개의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신포동은 이제 시나브로 어두워지는 중이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형형색색의 전구를 보며 거니는 사람들의 낯빛에도 '새해소망'의 불빛이 하나 둘 켜진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