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인천 편집장


어린 시절 동네 중국집 아들과 잠깐 친구로 지낸 적이 있다. 그 집 식구들은 그를 '밍밍'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화교 학교를 다녔다. 3학년 때 쯤 동네 철길에서 놀다가 얼굴을 트게 됐다. 우리 말이 어눌했지만 노는 데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밍밍, 노올자." 가끔 그의 집(중국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느 날 그는 홀 구석 테이블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공책에 글씨를 쓰고 있었는데 내 눈엔 모두 그림처럼 보였다. 밍밍이 글자들을 짚어가며 나에게 큰 소리로 읽어줬다. 말투가 너무 신기했다.

한 번은 주방 뒤쪽에 있는 안방에 들어 간 적이 있다. 대낮임에도 동굴 속처럼 어둠침침했다. 방 한 가운데 아주 두꺼운 이불이 깔려 있었다. "떼놈들은 일 년 내내 이불을 개지 않는다." 동네 아저씨들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에게는 할머니가 있었다. 항상 쪽진 머리에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며 목을 가린 짙은 회색 옷을 입었다. 아주 가끔 동네를 가로 질러 시내 쪽으로 걸어가곤 했는데 매우 뒤뚱거렸다. 친구들은 뒤를 쫓으며 흉내 내기도 했다.

지난 한 주간 인천과 관련한 중국 뉴스가 지역 신문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내용은 그야말로 '냉온탕'을 오갔다. '연평도 어민들 중국어선 나포', '제1회 한·중지사 성장회의 인천 송도 개최' '인천해경, 중국어선 압송' '인차이나 포럼 공식 출범'…, 이제 '인천'은 '중국'과 연관어가 됐다.

좋든 싫든 인천과 중국은 롤러코스트를 함께 타며 때론 환호성을 때론 장탄식을 같이 지르는 운명이다. 밍밍은 애칭이고 그가 쓴 글씨는 중국 한자였으며 침대 문화에 익숙해 하루 종일 이불을 깔아 놓았고 뒤뚱거린 것은 '전족(纏足)'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언론에 인천과 중국이 함께 단골로 등장해도 아직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지난해 3월 인천시는 중국어판 잡지 '인천지창(仁川之窓)'을 창간했다. 지방자치단체로는 최초다. 창문을 통해 좋은 빛(기운)이 스며들 듯 중국의 관광객(人)과 투자(物)가 많이 들어오길 희망하며 발간한다. 비록 1년에 네 번 발행하는 계간지이지만 이 잡지가 인천과 중국의 선린(善隣) 관계를 한층 북돋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친구 밍밍하고는 5학년 때 쯤 중국집이 대구 쪽으로 이사 가면서 헤어졌다. "밍밍, 인천에 와서 한번 노올자."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