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인천 편집장


'독특한' 사진전이 지난 주부터 인천시청 로비에서 열리고 있다. 재일동포 110년의 삶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유독 두 장의 사진에 눈길이 갔다. 6·25 전쟁 때 조국의 전선으로 향하는 재일학도의용군의 모습이다. 6, 7년 전 시청을 자주 드나들던 여든 살 가량의 김재생 어르신이 있었다. 늘 군복 비슷한 옷차림새를 했고 태극기와 성조기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다녔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눌 때 항상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했다. 그의 억양과 발음은 일본말 비슷했다. 그는 재일학도의용군 출신이었다. 그를 통해 의용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1950년 6·25전쟁 때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학도들이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조직해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태어났다. 생전 처음 대한해협을 넘은 그들은 인천상륙작전 때 미군과 함께 북성동 옛 오림포스호텔 주변 해안가에 상륙했다. 그곳에서 하루 야영하고 다음날 송림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해 몇 십 명 씩 흩어져 미군 각 부대에 배속됐다. 장진호전투 등에 투입됐고 135명(전사 52명, 실종 83명)이 희생됐다. 휴전협정 때 북한군 대표는 일본군이 참전했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한국말은 서툴고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하는 의용군 포로들 때문이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청년들은 앞다퉈 배낭을 메고 공항으로 달려가 예루살렘 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각국 언론은 '세계 최초의 재외국민 참전'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건 오보였다. 재일학도의용군이 역사상 그 보다 먼저다. 1956년 그들은 월미도에 충령비를 세우려고 했으나 군부대의 주둔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79년 돼서야 수봉공원에 '재일학도의용군참전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강공래'부터 '황평길'까지 642명 대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속에는 김재생 어르신도 있다.

사진전은 오늘까지다. 다음 전시 장소인 대전까지 쫓아갈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면 수봉산에 세워진 재일학도의용군참전비 앞에 서 보자. 사진보다 더 생생한 '조국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