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인천 편집장


매년 학급수가 줄어드는 학교의 창고, 옥상, 복도 등에 책걸상이 쌓여 있다는 소식이다. 인천시교육청은 이를 수리해서 수요 기관에 보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인구폭발 정점기에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당시 인천 인구(40만명) 보다 많은 도시가 1년에 하나씩 생겼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세 살 터울 셋만 낳고 단산하자' 등의 구호가 일상이었던 때다. 60· 70년대 인천은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끌어갔던 도시다.

일자리를 쫓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른들과 함께 아이들도 인천으로 밀려들어왔다. 학교는 아이들로 차고 넘쳤다. 당시 창영, 송림, 축현, 신흥, 서림, 만석 등 인천 대부분의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7000~ 8000명에 달했다.

필자가 다녔던 송현초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변에 대한중공업(현 현대제철), 한국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동일방직 등 큰 공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교실은 콩나물시루였다. 6학년 때는 일주일에 1명 꼴로 타 지역에서 전학을 왔다.

담임선생님은 '대한민국 전도(全圖)'를 칠판에 걸어놓고 전학 온 아이의 출신지를 짚어 주곤 했다. 제주도 빼고 전국 각지에서 왔다. 하도 자주 오니까 나중에 선생님은 지리교육이라 할 수 있는 이 과정을 생략했다.

가장 큰 문제는 책걸상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창고에서 부서진 걸상을 가져다 직접 수리하셨다. 복잡한 구조의 책상은 재료 조달이 여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선생님의 기술로는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은 널찍한 베니어판을 구해 와서 톱으로 잘라 책상 상판 만드는 작업을 하셨다. 두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합판을 잡아드렸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땀을 흘리시며 혼잣말을 하셨다. "정말 징글징글하다"

그 상판들은 줄분단 사이의 양쪽 책상에 걸쳐서 사용했다. 휴식시간이면 상판을 걷어내 홍해 갈라지듯 분단 통로가 생겼다. 현재 원도심 초등학교의 한 학교 전교생수는 기껏해야 500명 정도다. 10개 학교를 합쳐도 예전의 한 학교에도 못 미친다. 전입생은 없고 전출생만 있다. 그러니 학교마다 책걸상이 남아돈다. '아이들이 징글징글 하다'고 하셨던 선생님의 그 독백이 그립다.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