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 대한 심중한 경고
다양한 분야서 현상 심층분석
테러방지법·위안부 등도 다뤄
▲ <황해문화>
2016 봄 - 통권 90호
새얼문화재단
396쪽, 9000원

종합 시사문화계간지 <황해문화>(통권 90호)가 2016년 봄을 '헬조선'을 불러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헬조선'은 이미 몇몇 일간신문이나 인터넷 매체들이 이 현상에 주목하고 특집 등의 형태로 다루어왔다.

하지만 매체의 특성상 보다 심층적인 접근에는 한계가 있었다.중요한 것은 '헬조선'이 1회적 현상이거나 유행어 정도로 치부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가장 혹독한 악성의 형태로 신자유주의시대의 말기를 통과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심중한 경고의 메시지다.

그렇다면 이것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그에 대한 올바른 응답을 모색하는 것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일일지도 모른다. <황해문화>는 '헬조선 현상을 보는 눈'이란 주제로 2016년 한국사회를 깊이 들여다 본다.

하승우(땡땡책협동조합 공동대표)는 '헬조선에서도 인간다운 삶이 가능할까'란 화두를 던진다. 그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사라지고 종업원, 월급쟁이, 알바, 세입자 등 직업명으로 대신 불리는 주체성 없고 고립된 개별자들만 존재하는 곳으로 규정한다.

이름 없는 일반 시민과 기득권층 사이의 분리가 심화되고 두 세계에 각기 다른 상식이 존재해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곳, 그리고 시민들을 폭력으로 고립시키고 능동성을 가로막아 현재의 자리에 고착시키는 곳이 바로 헬조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생활의 향상이 아니라 단지 현상 유지를 위해서 과로와 학대와 폭력과 해고를 감수해야 하는 곳, 일터의 논리가 삶터를 잠식해가는 곳, 결국 모든 사람을 화폐물신의 노예로 만들어 탈출의 꿈조차 꾸지 못하게 하는, 지옥보다 더 나쁜 곳으로 묘사한다.

오찬호(사회학 연구자)는 '신계급사회가 정말로 두려운 이유'를 통해 다양한 통계와 예화를 보여준다. 이 통계는 한국사회를 이전에는 "평범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건 극도로 가난한 자들만의 경로였지만 이제는 가난하지 않게 자란 자들도 가난해지게 된 세상"임을 보여준다.

즉 중하층으로 내려갈수록 부와 지위의 하향적 세습이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잡고, 신분 상승은커녕 항상적으로 신분하락의 공포와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신계급사회'로 규정한다.

이런 신계급사회의 고착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사회가 이미 "불평등의 간격이 그나마 회복이 가능할 수 있는 터닝포인트를 지나가버린 사회"로서 구성원들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이탈' 아니면 '순응'을 택하거나 나아가 같은 처지의 구성원들의 일부를 경쟁에서 '배제'시키는 방식으로 이에 대응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

류동민(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의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위기―탈조선의 사회심리학'은 오늘의 한국사회가 '헬조선'이라 불리는 가장 큰 원인은 '세습중산층의 붕괴'로 표현되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파탄에서 온다고 본다.

건전한(?)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기여해온 능력에 따른 신분상승 혹은 신분안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현재 진행중인 중산층의 극단적 양극분해를 통해 파탄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헬조선'과 '탈조선'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개인들의 반응이지만 '탈조선'의 경우 이민이든 유학이든 그 역시 중하층에 속한 개인들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현실적 대안이라기보다는 '붕괴하고 있는 능력주의를 살려내려는 마지막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손이상(펑크음악가, 활동가)은 '껍데기는 가라'에서 거짓공약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남발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준다거나, 브랜드만 보고 집을 선택하는 예에서 보듯 한국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짓을 '믿는 척 하기' 게임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성장도 민주화도 내용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 오히려 진짜 성장과 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 이 글은 이것이 '헬조선'이라는 이름의 알맹이가 없는 지옥의 풍경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북한이나 일본 등 외부의 적과, 강력범죄자, 이방인, '사상이 의심스러운 이웃' 등 내부의 적을 부단히 만들어내서 공격함으로써 이 '알맹이 없음' 혹은 '껍데기만 있음'을 감추어 왔다고 본다.

박권일(칼럼니스트)은 ''헬조선', 체제를 유지하는 파국론'이란 글에서 "헬조선론이 내장한 모순의 인식틀(frame) 자체가 주체화나 집단행동을 끊임없이 방해"한다고 규정한다. 헬조선 담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글을 통해 사회모순을 인지하면서도 주체의 적극적인 개입과 시정을 배제하는 혐오와 자기모멸의 담론이라고 지적한다.

특집 뿐 아니라 이번 호에선 영화, 음악, TV, 문학, 미술, 건축, 만화 등 문화비평 필자에게도 각 분야에서 '헬조선 현상'과 관련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 결과 '헬조선'은 오늘날 우리 문화 전 부면에서도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성원 편집장은 말했다.

꿈 없는 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서사가 즐비하고(영화, 음악, TV, 만화), 문화비평자 자신이 최저낙원에서의 글쓰기의 자의식에 괴로워하며(미술), 시작부터 미래를 저당 잡힌 청춘들이 전문직-되기의 좁은 문 앞에 줄을 서야 하고(건축), 주체들의 인식 자체가 식민화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문학) 상황인 것이다.

지난 2012년 국회선진화법 통과 이후 첫 필리버스터를 야기하고 있는 '테러방지법'과 관련한 한상희 건국대 교수의 글도 눈에 띈다. 한 교수는 '복면금지법과 테러방지법, 그 음모의 정치학'에서 복면금지법과 테러방지법은 무엇인지, 독소조항은 무엇인지, 그리고 정부여당이 이 법안들을 통과시키고자 하는 속내는 무엇인지 조목조목 지적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는 '테러방지법'이라는 이름의 법장치만 없을 뿐이지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국가권력의 동원체제를 갖추고 있는데, 일찌감치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어버린 국정원에 잉여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정부의 영구집권 욕망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이때문에 한국사회에서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정원을 완전히 해체하고 해외정보원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이밖에도 해방 70년, 한일협정 50년을 맞이하여 기획한 '두 문제국가 사이에서'의 마지막으로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정리한 조시현 전 건국대 교수의 글과, 한국을 대표하는 재일조선인 전문가인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의 '낯선 이웃, 재일조선인'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와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IS(이슬람국가)의 테러를 각각 다룬 김육훈 역사교육연구소장과 서정민 한국외대 교수의 글도 수록되어 있다.

시인 류근, 김소연 등의 신작시와 소설가 윤동수, 이재은의 신작소설, 사진가 임기성의 포토에세이 등은 황해문화 봄호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396쪽, 9000원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