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본격화한 '인천 가치재창조' 바람이 거세다.

시는 어제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인 축구와 야구가 인천에서 시작됐다는 자료를 공개했다. 야구는 오래 전부터 시발지가 인천이라는 말이 있어왔지만 축구도 인천을 통해 상륙했다는 사실이 시에 의해 공식화된 것이다. 시의 설명은 이렇다. 1882년 제물포항에 입항한 영국 군함 장병들이 잠시 뭍에 올라와 축구를 했다. 허가없이 상륙했다는 이유로 다시 배로 쫓겨가면서 버려진 공을 아이들이 가지고 놀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에 축구가 전래된 연유라는 것이다.

1901년 활동했던 강화학당 축구팀이 첫 근대 축구팀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야구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것이기에 생략한다. 시는 앞으로 가치재창조 정책에 따라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을 연이어 공개할 방침이다.

사실 개항기 서울의 인후(咽喉) 역할을 했던 인천은 축구나 야구 말고도 숱하게 많은 '국내 최초' 기록을 갖고 있다. 그 중에는 문헌자료 등을 통해 확실히 고증된 것도, 또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지금의 중구 신포동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에 산재했던 그 역사의 흔적들은 대부분 6·25 전쟁과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와 함께 수 십년간 지속됐던 개발의 광풍 속에 사라져갔다. 통탄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1800년대 말, 그 당시의 유적이나 유물들 중 적어도 반 만이라도 남아있었더라면 지금 인천의 모습은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인천시가 벌이고 있는 가치재창조사업, 만시지탄이지만 박수를 보내면서 몇 가지 당부하고 싶다. 단순한 옛 것의 복원에 그친다면 큰 의미가 없다. 과거를 되살려 오늘 그리고 미래 인천의 가치를 재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재창조'라 본다. 그런 측면에서 스토리와 텔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검토됐겠지만 이 사업이 시장(市長)의 치적쌓기용으로 추진돼서는 절대 안 된다. 과거 우리는 그런 사례를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그에 따른 폐해나 후유증은 또 얼마나 컸던가. 이를 위해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도 무엇보다 필요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