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현 인천부현동초 교사
▲ <멀쩡한 이유정> 유은실, 푸른숲

부끄러운 모습 콕 찌르는 이야기
정답 아닌 물음으로 생각거리 줘
잔잔한 서정 삶의 여백 같은 동화


어렸을 적 방아다리에 깔 비러 나갔다가 깔은 못 비고 손가락만 비어 선혈이 뚝뚝 돋는 왼손 검지손가락을 풀잎으로 감싸 쥐고 하얗게 질려 뛰어오는데 아버지처럼 젊은 들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가 괜찮다 우지마라 아가 괜찮다 우지마라!" 그 뒤로 나는 들에서 제일 훌륭한 풀꾼이 되었다. -이시영 시인의 「풀꾼」

살면서 "괜찮아"라는 말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실수해도 괜찮아" "공부를 못해도 괜찮아" "안 예뻐도 괜찮아" …… 그리고 "너가 많이 모자라지만 그냥 그대로도 괜찮아" 같은 말들. 내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나아가 사랑하며 사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나이가 쌓이는 만큼 실수도 잘못도 쌓여가고 나 자신이 부끄러운 순간들이 늘어간다.

이시영 시인의 시처럼 '아가 괜찮다'라고 말해주면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동화작가 유은실의 작품은 무작정 위로를 건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이런 부끄럽고 창피하고 모자란 모습 정 가운데를 아프게 쿡 찔러 보여주는 데 탁월하다.

비유하자면 입은 웃고 있지만 눈으로는 울고 있는 표정처럼 조금 씁쓸하면서 웃기고 조금 아프면서 따뜻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오늘 소개하는 『멀쩡한 이유정』은 그러한 작품들 가운데에서 조금 덜 아프고 덜 씁쓸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저학년 문고로 출판되었지만 중학년부터 고학년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표제작인 「멀쩡한 이유정」은 초등학교 4학년이지만 아직도 왼쪽과 오른쪽이 헷갈리고 그래서 동생 없이는 집에도 혼자 가기 힘든, 방향치(方向癡)이자 길치인 유정이의 이야기이다. 또 다른 작품 「할아버지 숙제」는 술 주정꾼이고 노름꾼이었던 할아버지들에 대해 조사해가는 숙제를 앞두고 어떻게 숙제를 해야 할지, 심지어 숙제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경수의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 모두 남들에게는 말하기 부끄러운 약점이나 부끄러운 가족을 가진 아이들을 보여주고 있다.

「멀쩡한 이유정」에서는 한참 동안 길을 헤맨 유정이가 자신과 비슷하게 길을 헤매던 학습지 선생님을 만남으로써 동질감을 느끼고 이상한 위로를 받는 것으로 끝난다. 한편「할아버지 숙제」에서는 처음엔 그런 할아버지들이 부끄러워 숙제를 포기하려던 경수가 엄마의 도움으로 할아버지의 부끄러운 점을 조금 덜 부끄럽게 바꿔서 쓰는 방법을 배워간다. 그렇게 숙제를 마친 경수가 자신의 친구 명규도 이렇게 할아버지 숙제를 하는 방법을 알아야 할텐데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비슷한 소재이지만 「멀쩡한 이유정」이 "그러니까 괜찮아"라고 말하고 있다면 「할아버지 숙제」는 "그런데 이렇게 해도 괜찮아?"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읽힌다. 아닌게 아니라「할아버지 숙제」를 읽은 6학년 아이들 중에는 경수처럼 적당히 부끄러움을 가리면서 거짓말도 하지 않는 방법으로 숙제를 하겠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러면 그건 우리 할아버지가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며 그런 방법에 대해 비판한 아이들도 있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부끄럽고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러한 모습이 작품 바깥의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더 깊이 생각하게 했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나머지 이야기 가운데 「그냥」과 「눈」은 동화이지만 한 편의 긴 시를 읽는 것처럼 서정성을 함께 갖춘 작품이다. 「그냥」은 아무런 이유 없이 무목적적이고 잉여적인 시간을 원하는 아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삶에서 필요한 여백이나 일종의 비상구 같은 시간들을 동화로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인상 깊다.

마지막 수록작인「새우가 없는 마을」은 가난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페이소스(pathos:동정과 연민의 감정, 또는 애상감(哀傷感), 비애감이라는 뜻을 가지는 그리스어)가 우리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하면서 생각할 거리들을 남겨 둔다. 짧고 가벼운 동화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들은 주머니 속 호두알처럼 두고두고 굴려도 좋을 만큼 단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