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따라 길따라] (18) 인천 계양산과 '대길가든'
[맛따라 길따라] (18) 인천 계양산과 '대길가든'
  • 김진국
  • 승인 201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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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휴식<休食>하다
▲ 계양산은 인천의 명산이자 부평·계양의 진산으로 인천시민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산이다. 한 등산객이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오르고 있다.

부평 진산·인천 대표산 '계양산' 산행코스 다양
의적 임꺽정 전설 깃든 '징매이고개' 고려 군사시설 연희진 등 곳곳 이야깃거리

경명대로 한 켠 '대길가든' 한우고기 별미'

계양산은 부평의 진산이자 인천의 대표적인 산이다. 계양산은 인천 곳곳을 축으로 이으며 인천의 허파역할을 하는 산이라 할 수 있다. 계양산을 오르는 길은 워낙 많아 어느 곳 한 곳을 추천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우선 인천둘레길 1코스 출발지인 '연무정'이 대표적인 출발지라 할 수 있다.

연무정을 떠나 계양산 정상으로 오르다보면 '계양산성'을 만날 수 있다. 약 15분쯤 오르면 낭떠러지 같은 석벽을 만나는데 이게 바로 계양산성이다. 팔각정에서 4~5m 떨어진 난간 바깥쪽 지점에 보이는 가파른 절벽은 풀나무로 뒤덮였지만 반듯하게 각이 진 절벽은 인공적인 느낌을 발산하고 있다. 계양산성은 계양산(해발 395m) 주봉에서 뻗어내린 해발 230m 지점에 위치하며 봉우리를 중심으로 테두리를 두르듯 쌓은 '테뫼식' 성이다.

계양산에 성을 쌓은 이유는 계양산이 김포평야와 인천해안은 물론, 수도까지 연결된 군사·경제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계양산성에서 남쪽 방향을 바라보면 천마산과 원적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1500년전 계양산성에선 성을 빼앗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다.

조금 더 지나면 네 갈래 길이 나타나는데 이름하여 '하느재고개'이다. 옛날 부평의 중심지는 도호부청사가 있는 계양산 남쪽이었고 북쪽은 말하자면 변두리였다. '목상리'(木霜里)란 이름처럼 나무가 많았던 북쪽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팔기 위해 하느재고개를 넘어다녀야 했다.

산을 돌아 김포쪽으로 오는 길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고개가 얼마나 험하고 가파른지, 마치 걸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 만큼 힘겹게 느껴져 '하늘재'라고 불렀고 시간이 지나며 하느재로 바뀌었다. '땀이 비오듯 흐른다'는 뜻의 '하누재'라고도 불렀다.

목상동은 '나무서리'의 한자식 표현이다. 고려 때 '수소리'(樹蘇里)였던 마을 이름은 시간이 지나며 나무서리가 되고, 나무 목(木) 서리 상(霜) 자를 써 목상리가 된다.

하느재고개를 넘고 '고랑재고개'를 지나면 목상동에 닿는다. 이 곳엔 낙우송과 비목나무 등 귀한 나무들을 만날 수 있으며 도룡뇽도 서식하고 있다.

계양산을 오르는 또다른 코스는 징매이고개를 지나 서구 물썰매장을 거쳐 오르는 것이다.

징매이고개는 임꺽정의 전설이 숨어 있는 곳이다. 500년 전, 계양산을 호령했던 백정 출신의 조선 중기 의적. 임꺽정은 계양산 '징매이고개'에 머물며 이 길을 넘어가는 탐관오리들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징매이고개는 서해안과 수도 서울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고 이 고개에서 탈취한 재물은 그의 소굴이 아닌 빈민들에게 전해졌다. 자신을 비난하는 관리나 양반, 토호를 향해 임꺽정은 외쳤다. "도적질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적이 되는 것은 굶주림과 추위가 절박하기 때문이다. 선민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임꺽정 말고도 징매이고개는 도둑들로 들끓었다. 솔밭이 우거진데다 산세가 험준해 소굴로 삼기에 적당했기 때문이다. 백명 혹은 천명이 함께 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해 '백명고개' '천명고개'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금 산이 돼버린 임꺽정은 말이 없고, 그가 활약하던 징매이고개는 서구와 계양구를 잇는 8차선의 '경명대로'가 되었다. 징매이고개의 '징매'는 '매를 징발한다'는 뜻이다.

이 지역이 징매이고개로 불려진 이유는 고려시대 국영매방인 '응방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매사냥을 좋아했던 고려 충렬왕은 처음 수도 개성에 국영매방을 운영했었다. 그런데 매들이 민가로 날아 들어가 가축을 공격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심해졌고, 왕은 결국 백성들의 피해가 없을 만한 매사냥터를 찾아보라고 명한다. 그렇게 방방곡곡을 돌며 찾아낸 곳이 바로 계양산이었다.

계양산은 온갖 야생동물이 넘쳐나는 동물들의 천국이었다. 저녁무렵, 붉은 석양이 우거진 산림과 이리저리 날고 뛰는 동물들을 비출 때면 마치 '시원의 세계'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계양산을 거니노라면 지금도 푸드득 요란한 소리를 내며 꿩이 날아오르기도 한다. 지금의 공촌정수장 8차선 도로 건너편 일대가 응방지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계양구의 끝지점인 계양구와 서구의 경계 '생태통로'에서 시작할 수 있다.

8차선의 경명대로 위로 다리처럼 놓여진 생태통로는 개항초기 '중심성'(衆心城)이 있던 자리다. 1883년 서구 열강들의 강요로 개항을 결정한 고종임금은 이 자리에 성을 세우라고 명한다. 병인·신미양요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왕은 경명현을 주요 전선으로 판단한 것이다.

동쪽으로 171m, 서쪽으로 297m, 성문이 3m에 이른 총연장 471m의 중심성은 그러나 별다른 쓰임 없이 방치되다 1914년 헐리고 만다. 중심성은 당시 축조를 지휘했던 부평부사 박희방이 백성들의 노고를 치하해 지은 이름이다.

이 경명대로 한 켠에 위치한 '대길가든'(032-548-2211)은 한우고기 전문점이다. 대길가든에선 한우생등심에서부터 소양념갈비, 돼지왕갈비 등 고기 종류는 모두 맛 볼 수 있지만 점심특선이 가장 괜찮다. 1인분에 8000원인 점심특선은 불고기쌈밥정식, 제육쌈밥정식, 소고기국수진골 골, 돼지갈비정식(1만2000원) 등이 있다. 점심특선은 특히 금세 지은 잡곡밥이 나오므로 건강에도 그만이다. 식사 뒤 금붕어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연못이 있는 휴식터에서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맛도 쏠쏠하다.

서구와 계양구를 가르는 천마산은 서구 공촌동·심곡동과 계양구 효성동 사이에 걸쳐 있다.

▲ 계양산 자락인 천마산 정상에서 시민들이 쉬고 있다.

생태통로를 출발, 군부대 정문을 지나고 공촌정수장을 조금 못 미쳐 왼편 오솔길로 접어들면 '미추홀사격장'이라고 쓴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군부대 사격장이다. 총소리가 신경을 날카롭게 하지만, 과거에도 이 곳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서해안에서 수도로 직접 통하는 요지였기 때문이다.

고려말 우왕4년(1378) 인천과 부평 일대에 왜구가 출몰했으며 임진, 병자년 양란 때 한양의 방어를 위한 계양산 '중심성'을 비롯해 '연희진'과 그 소속포대가 있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볼 때 이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터만 남은 '축곶봉수'(서구 가정동 산 54)와 '연희진지'(서구 연희동 247번지 계명공원)는 서해안 방어의 주요 군사시설이었다.

축곶봉수에서 시작된 봉화는 순식간에 문학산과 강화도를 지나 서울 남산까지 닿았다. 축곶봉수는 '검단 백석산-통진 수안성산-강화 진강산-교동 화개산' 봉수까지 이어졌다가 다시 '강화 화음산-강화 송악산-통진 남산-김포 북성산-양천 화개산-서울 남산 제5봉'으로 연결됐다.

축곶봉수가 자리한 지역의 지형은 계양산과 천마산, 원적산이 남북으로 길게 해안을 따라 형성됐으며 산에서 발원한 심곡천과 공촌천, 시천천은 바다와 연결돼 있었다. 배가 갯골을 따라 육지로 드나들 수 있는 해안 방어의 중요지점이었던 셈이다.

연희진은 1879(고종16)년 고종임금이 축조를 명하면서 동구 화수동 화도진과 함께 설치됐다.

진(鎭)은 국경지역과 같은 요지나 적들이 침투하기 쉬운 바다, 강가에 설치한 특별행정구역. 연희진은 지금의 연희동과 원창동, 가좌동 일대의 포대를 관할했다. 이 곳엔 청동으로 몸체를 만들어 고정한 대포가 설치됐는데 화약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식의 무기였다. 연희진이 속한 부평도호부는 이전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곳이었으나 개항을 전후해 연안방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많은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사격장의 총소리가 멀어졌을 때 푸른 잔디가 펼쳐진 너른 공원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렇게 서곶근린공원에 닿으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터도 만날 수 있다. 심곡동에서 잠깐 도시로 빠져나온 트래킹은 '인재개발원'을 지나며 다시 천마산 숲 속으로 이어진다.

천마산(天馬山)이란 이름은 천마가 나왔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아득히 먼 옛날, 가정동 이 씨 집안에서 예쁜 아기가 태어난다. 어깨에 날개가 달리고 힘도 장사인 비범한 아기였다. 관은 특출한 아기가 태어나면 감시를 했다. 아기장수가 커서 나라의 반역자가 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부모는 결국 자식을 '가슴에 묻고' 만다. 이때 천마가 나타나 아기장수의 집을 빙빙 돌며 울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때부터 이곳은 천마산이 되었다.

인천사람들은 서구에서 부평구에 걸쳐있는 산 이름을 '철마산'으로 잘못 알고 있다. 이는 1916년 조선총독부가 세부측량을 하면서 지도에 철마산으로 표기했기 때문이라고 고 조기준 선생은 밝힌 바 있다. 광복 70주년에 서서 잘못된 지명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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