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조선시대 서해 섬들 제례 '합사'
[인천일보 연중기획] 조선시대 서해 섬들 제례 '합사'
  • 김진국
  • 승인 2015.0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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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35> 서해안 지역 유일의 국가제사 공간, 원도사(猿島祠)
▲ 동여도 속에 보이는 원도.
▲ 대동여지도에 보이는 원도.
인천은 바다와 섬, 그리고 육지와 어우러진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바다에서의 풍어를 기원하는 대동굿이나 농경의 풍요와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동제나 기우제 등을 지내왔다. 그 가운데 조선시대 서해안 일대에서 유일하게 국가제사를 담당했던 공간이 인천의 원도사였다.

제사 지내는 납(納)섬, 멀리 떨어져 있어 낙섬
지금은 아파트 조성과 도시개발에 밀려 고유의 전통이나 풍속을 유지한 마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공동체 구성원간의 단합을 도모했던 동제조차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지만, 제사의 범위나 영향력이 마을에 한정되지 않고 국가와 지방관,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제사가 인천지역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낙섬의 원도사(猿島祠)에서 지냈던 제사다.

학익동 동양화학 앞에서 용현동을 지나 숭의동으로 넘어가는 큰 길에 낙섬 사거리가 있다. 지금은 매립과 도로 개설로 대부분 없어져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몇 십년 전만 해도 이곳 앞바다에 있었던 작은 무인도 '낙섬'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주변이 온통 갯벌과 염전으로 뒤덮여 있던 시절,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낙섬'이라 불렸던 이 섬은 미군의 커다란 기름 저장탱크와 함께 염전에 바닷물을 대는 저수지가 있어 아이들에게 좋은 수영장이었다. 근래에는 도로와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려 그 위치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지만, 낙섬은 조선시대에 원도(猿島)라 불리며 서해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섬의 형태가 원숭이 모양이어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고도 하는 원도는 일부 학자들의 해석처럼 낙섬이라는 이름이 육지에서 떨어져 있어서라기보다는 '납(納)섬', 곧 '제사를 드리는 섬'에서 유래했다가 발음이 바뀌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기록으로 보는 원도
원도사의 설치와 운영 및 그 폐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세종 19년(1437) 3월 및 중종 22년(1527) 5월에 국가제사와 관련돼 원도의 경우, 인천군의 자연도(紫燕島)·수심도(水深島) 등 제도(諸島)의 신주를 모아 여러 개의 위판을 대상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음이 언급돼 있다. 따라서 원도의 제사는 그 자체가 제사의 대상이 아니라 인천 부근의 여러 섬들의 제례를 합사(合祀)시킨 것을 알 수 있다.
또, 중종대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 및 사묘조에 "원도(猿島), 부(府) 서쪽 12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섬 가운데에 여러 섬의 신제단(神祭壇)이 있는데, 봄 가을에 악해독(岳海瀆)에 제사를 지낼 때에 수령이 친히 행한다. 원도사(猿島祠), 여러 섬의 신령을 이 섬에서 합하여 제사지내며 봄·가을에는 본 고을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 국가제사는 그 규모에 따라 대사(大祀)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누었고, 국가 예전(禮典)에는 사전(祀典)을 구분해 중사에는 악해독(岳海瀆), 소사에는 명산대천 등과 같이 분류하였다. 이에 따른다면 원도사의 제사는 중사 정도의 규모였던 것이다.


원도는 이외에 1656년에 편찬된 유형원의<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와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 1842년, 1871년, 1899년에 각각 편찬된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 1863년에 편찬된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된 원도의 위치와 춘추에 신단제사를 설명하고 있다. 즉, 이곳은 조선시대 왕조의 안위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지방 수령인 인천부사가 직접 나와 봄·가을로 제사지내던 곳으로 동해는 강릉, 남해는 순천, 서해는 인천 원도에서 국가제사를 지냈던 상징적인 장소였다.

원도의 존재는 지도에도 명확히 나타나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표시돼 있고,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만든 지도나 1937년 일본에서 제작한 관광객용 지도 <경승(景勝)의 인천>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국가제사를 담당한 정신적 공간
서해안지역 국가제사를 담당했던 원도가 갖는 정신적 공간으로서의 역할은 병자호란때 호국의 장소가 되면서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윤생은 의병을 모집해 원도에 들어가 최후까지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그 소식을 접한 부인 강씨는 곧 바다에 몸을 던져 부군과 함께 의절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철종 12년(1861) 이윤생은 좌승지에 부인 강씨는 숙부인에 각각 추증됐다. 그 정려각은 현재 남구 용현동에 남아 있다.

원도사의 제사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인천부읍지>(1842, 1871, 1899)의 기록에 모두 '지금은 폐지되었다(今廢)' 라는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19세기 초에는 폐지됐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은 정치적으로 이른바 순조, 헌종, 철종에 이르는 세도정치기였고 사회적으로 신유박해(1801)로부터 병인박해(1866)에 이르기까지 4차례 걸쳐 천주교 수용과 그 전례문제로 혼돈과 수난의 시기였다. 더구나 대외적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소용돌이 속에 일본과 중국에 이어 조선이 개항되는 등 급변하는 대내외 정세와 갈등으로 조선 전기부터 이어진 국가제사의 전통과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바다 도시 인천의 역사적 성격에는 조선시대 서해안지역 국가제사를 담당했던 원도사의 정신적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2015년, 우리가 지향하는 '인천의 가치 재창조'는 미추홀 2030년, '인천' 이름 탄생 600년이라는 오랜 역사의 흐름과 그 내면에 담겨 있는 문화자산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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