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30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 향토예비군 창설
1970·71년 세 차례 인천 침투사건 투입
▲ 1974년 6월13일 인천시청 여직원들로 구성된 예비군 소대 결단식의 모습. 예비군복을 갖춰 입고 군기 바짝 든 분위기 속에서 맨 앞줄에 서있는 한 대원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
지난 4월3일은 '향토예비군의 날'이었다.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 '일하면서 싸운다' 등의 모토로 1968년 4월1일 예비군이 전국적으로 창설돼 올해로 47년이 되었다.

요즘은 무장한 공산 게릴라들을 뜻하는 '공비(共匪)'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무장공비가 자주 출현했던 1980년 대 까지는 매우 익숙한 단어였다. 1968년 1월21일 북한무장공비가 서울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1.21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향토예비군은 1961년 설치법령이 제정됐지만, 예산 부족 등으로 창설이 미뤄져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서둘러 예비군을 창설했다. 창설되자마자 예비군은 울진과 삼척에 침투한 공비 소탕전에 참가하는 등 실전에 배치되었다.

무장공비 출현은 인천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때마다 예비군이 동원되었다. 1970년 6월22일 6명의 무장공비가 공작선을 타고 인천 앞바다에 침투했다. 육해공 병력과 경찰이 즉시 소탕 작전을 폈다. 이 합동작전에는 수백명의 예비군도 동원되었다. 교전 끝에 무장공비는 전원 사살되었다.

이때 예비군 고(故) 권태화 씨가 전사했다. 인천 지역 예비군 중 첫 희생자였다. 합동장례식이 7월3일 오전 10시 경기도경찰국 뒷마당(현 중구 하버파크호텔 자리)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해 내무부장관 그리고 시민 등 2000여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되었다.

그해 11월9일 일요일 새벽을 틈타 무장공비가 다시 율도 부근에 출현했다. 율도는 청라도, 장도 등의 섬과 함께 매립돼 현재의 서구 청라지역이 된 섬으로 부근에는 발전소와 정유사 등 주요시설이 있었다.

공비들은 향토예비군 무기고를 기습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해안지역의 유류저장탱크 등을 폭파하는 임무를 띠고 남파됐다. 소탕 작전에는 서곶중대 소속 향토예비군과 인천화력발전소 소속 예비군들이 동원되었다. 공비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 발전소 경비원 고(故) 김성운 씨가 전사했다.

해가 바뀌어도 공비들의 침투는 계속되었다. 1971년 5월4일 밤 11시 야음을 틈타 무장간첩선 한 척이 동구 송현동 해안선에 나타났다. 그들은 예비군복으로 위장했다. 곧바로 해안경비정에 발견돼 격전을 벌이다 인천부두 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교전 중 동인천경찰서 소속 고(故) 김석정 순경이 사망했다. 공비들은 부두에 있던 경찰경비정에 사격을 가하고 북으로 도주했다. 공비들이 인천 깊숙이 들어오는 사건이 터지자 이후 송현동 해안에 전투경찰대를 배치했다. 지금의 현대제철 공장 안쪽 해안선에 중대 단위의 전경대가 자리 잡고 빈틈없는 해안 경계를 펼쳤다.

당시 예비군의 활약상은 정규군 못지않았고 그에 따른 임무도 막중했다. 1970년대 북한 김일성은 호시탐탐 남침을 노렸지만 섣불리 단행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당시 200만 예비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시중에 떠돌았다. 예비군 중 월남에 파병됐던 참전 용사들의 실제 전투력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모든 지역이 전방이라 할 수 있는 인천의 향토방위에는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1996년 6월2일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 군인 부인들로 구성된 여자예비군 부대가 창설되었다. 해병대 장교 부인 29명, 하사관 부인 62명 등 모두 91명이 4개 소대로 편성되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사격, 화생방 훈련을 실시했고 유사시 부상병 응급 처치와 취사 등 전투 지원 임무를 맡았다.

이에 앞서 백령도에서는 1989년 4월 37명으로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예비군 부대가 창설된 상황이었다. 최연소 대원이 32세, 최고령 대원이 63세였다. 현재 인천에는 연수구를 비롯해 중구와 남구에 여성예비군 소대가 창설됐다. 전국에는 6300여명의 여성예비군이 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