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29)옹진의 섬-가치 창조의 자원
▲ 휴전 후 옹진지도(1953.7.27)
▲ 백령도 사곶사빈
많은 사람들이 인천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인천상륙작전, 인천 개항, 자유공원, 맥아더장군 동상, 바다, 짠물, 월미도 그리고 2014인천아시안게임 등이지 싶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는 여러 개의 구슬들일뿐 이를 의미 있는 주제로 꿰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 주제 중의 하나가 인천의 섬이다. 인천에는 현재 162개의 섬이 있다. 그 가운데 옹진군에만 115개의 섬이 있고, 인천의 유인도 36개 중에 23개의 섬이 자리하고 있다.

두 개의 옹진
옹진군은 지형상 북으로는 강화군·황해도 장연군·옹진군·해주시·연백군과 동으로는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와 남으로는 충청남도 당진군·태안군과 접하고 있다. 옹진의 '옹(甕)'자는 '독, 단지' 등을 뜻하는 말로 이 지역의 형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연유로 이러한 지명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휴전 후 옹진지도(1953.7.27)
일찍이 고구려때 옹천(甕遷)이라 했다가 고려 초기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근대에서의 옹진은 황해도의 옹진반도 일대를 지칭하는 지역이었는데, 광복 이후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현재의 옹진은 1953년 7월 6·25전쟁이 정전되면서 휴전협정에 의해 탄생되었다.

따라서 본래 황해도 옹진군이었던 지역은 모두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이 되었고, 경기도 옹진군에는 1945년 11월에 편입되었던 백령면의 백령도·대청도·소청도와 송림면의 연평도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부천군의 섬 지역이 모두 옹진군에 편입되는데, 그중에 영종도와 용유도는 1989년 인천시 중구에, 대부도는 1994년 안산시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95년 3월 옹진군 일원이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면서 현재 백령면, 영흥면, 북도면, 덕적면, 연평면, 대청면, 자월면 등 7개 면과 장봉·소청 등 2개의 출장소로 구성되었다.

인천의 섬은 모두 162개인데, 사람들이 거주하는 섬은 36곳, 사람이 살지 않은 섬이 126곳이다. 이 가운데 옹진군에 위치한 섬은 115개로 유인도가 23곳, 무인도가 92곳으로 명실상부하게 인천의 섬을 대표하고 있다.

옹진의 역사적 역할
옹진지역은 중국과의 통교에 있어 중간 기착지로서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중국과의 교역로는 주로 덕적도를 경유해서 산동반도를 가는 길이었다.

삼국시대,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 당나라 소정방이 서해를 횡단하여 백제로 향했고 태자 김법민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적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했던 기록이 있다. 한편으로 육지와 멀리 떨어진 입지적 여건으로 주요 정치범들의 유배지가 되기도 하였다.

원나라 순제가 황태자 시절, 계모의 모함으로 대청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소환되어 황제로 즉위했다는 이야기, 고려 태조 때의 무장 유금필 장군이 백령도에 유배되었던 기록, 조선 광해군 때 명신 이대기(李大期)가 영창대군의 죽음과 폐비사건과 관련되어 백령도에서 4년간의 유배생활하면서 '백령도지'를 편찬하였던 사실 등이 이러한 정황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려 말 이래 수없이 창궐했던 왜구와 해적들의 침입으로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워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정책'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관리되었고 그 규모 또한 작지 않았다.

백령도 사곶사빈
검푸른 섬이라는 의미를 가진 대청도는 1918년 일본 포경회사의 기지가 되어 1930년대 초까지 포경업이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몸집이 큰 대왕고래도 대부분 대청도에서 잡혔다. 그러나 대청도의 포경업은 1934년부터 급속한 어획량의 감소와 세계공황의 여파로 고래 수요까지 떨어져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평탄하고 들판같이 길게 뻗은 섬이라는 뜻의 연평도는 조기잡이로 유명했다. 매년 4월 하순경 수많은 조기떼가 뱃속에 가득한 알을 낳으려고 북상하여 연평 앞바다를 황금으로 물들이는 장관을 연출했다. 연평도는 전라도 칠산어장, 평안도 용암어장과 더불어 조기의 3대 어장으로 알려졌는데, '조기의 왕국', '조선의 찬장'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리고 이 조기를 매개로 전국의 많은 어선과 어부,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조기 파시촌이 형성되었다.

'흰 날개' 라는 뜻의 백령도(白翎島)는 고려 태조 때 백령도에 진(鎭)이 설치되어 일찍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관리되었다.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자 이른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펴면서 버려진 섬으로 변하였지만, 조선 세종 13년(1431)에 국영목장을 설립하고 선박 및 각종 건축에 필요한 재목(材木) 확보를 위해 송전(松田)을 일구는 등 '해도개발론(海島開發論)'을 정책적으로 시행하기도 하였다. 또 조선후기까지 국영염전으로 백령자염(白翎煮鹽)을 생산하던 이른바 갈염(乫鹽) 염벗이 있었다.

자월도에도 조선 중엽에 설치한 목장이 조선후기까지 존속되었으며 고사리골(古寺谷)에는 마성(馬城)의 흔적이 남아있다. 영흥도는 여몽연합군이 삼별초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장봉도에도 마성터 외에 고려시대에 강화도가 함락되는 것을 대비한 이궁, 혹은 별장으로 추측되는 장봉궁과 장봉신궁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옹진군의 지정 문화재는 천연기념물이 8점, 명승이 1점 등 9점이다. 그 중 대다수는 백령도에 위치해 있다. 아직 지정되지 않은 잠재된 문화유산들도 있다. 백령도는 천연기념물인 사곶사빈, 콩돌해안, 명승인 두무진과 2014인천아시안게임의 마스코트인 점박이 물범의 서식처라는 관광자원 외에도, 자염생산지, 말목장, 100년이 넘는 중화동 교회로 대표되는 개신교 수용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옹진군 각 섬은 유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문화자원을 활용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문화유산의 보고임을 알 수 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