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학의 형상 … 2032년 역사 간직 '寶庫'
[인천일보 연중기획] 학의 형상 … 2032년 역사 간직 '寶庫'
  • 김진국
  • 승인 201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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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15> 비상(飛翔)하는 인천, 문학산
▲ 문학산성.
'문학산'은 비류의 미추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030년이 넘는 인천 역사의 편린을 간직한 보고(寶庫)다. 여기에 공중에서 내려다 본 문학산의 형상은 비상하는 한 마리의 학을 닮아 있어, 그 명칭이 향교의 문묘(文廟)와 학산서원(鶴山書院)에서 연유됐다는 정신적 자긍심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비상(飛翔)의 또 다른 출발지라 할 것이다.

▲인천 역사의 뿌리
'문학산'은 지형상 현재 선학동의 길마산으로부터 선유봉, 문학산, 연경산 그리고 학익동의 노적산까지 길게 연결돼, 남구와 연수구를 가로지르면서 동서로 4.6㎞ 길게 뻗은 높이 213m 정도의 산이다. 여기에 연수구의 청량산과 봉재산이 남쪽 아래로 연결돼 있어 하늘에서 보면 마치 날으는 '학'의 형상을 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문학산 일대는 바다와 인접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일찍부터 생활터전이 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바, BC 18년 인천 역사의 출발지인 비류의 미추홀로 자리한 이래, 2014년 현재 2032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전근대 시기 읍치(邑治)인 인천도호부청사의 앞쪽에 위치해 안산(案山), 혹은 남산으로 불렸지만, 실제적으로는 인천 지역의 정신적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 속 인천과 문학산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고을 관아(인천도호부) 남쪽의 안산(案山)으로 여겨져 남산, 학이 날개를 편 형상이라 하여 학산(鶴山), 산성이 있어서 성산(城山)이라 불렸다. 다만, 학산에 만들어진 '인천서원'이 1708년 '학산서원(鶴山書院)'이라 사액을 받은 뒤에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주변에 위치한 인천향교에 문묘(文廟)가 있어 '문(文)'자를 합쳐 '문학산'이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해동지도(海東地圖)> 등 18세기 중엽 이후의 지지와 고지도에 '문학산'이라 표기돼 있다.

▲문학산 입지
비류가 미추홀을 택했던 것은 바다와 가까운 입지 조건이 당시 소금을 매개로 해상교역망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 성장을 꾀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곡의 중요한 운항로였고 교통의 요충지이자, 국방상 중요 거점이었다. 임진왜란때는 물론,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문학산성에 군사진지를 두고 강화도에서의 전쟁 진행 상황을 살폈던, '소성진중일지'의 기록을 통해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간직한 곳이 문학산성이었고, 산성 내에 있었던 안관당(安官堂)은 그 역사적 흔적의 하나이다. 안관당은 1949년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문학산 봉수 아래 석축의 건물이 있는데, 조선 후기의 건물로 임진왜란때 산성에서 왜적과 싸운 인천부사 김민선을 모신 사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돼<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1899)에는 임진왜란 때 부사 김민선(金敏善)과 김찬선이 문학산성을 중수하고 주민들을 이끌어 왜군을 격퇴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 신미양요 당시에도 문학산에 군사 진영을 두고 경계를 강화했으며 문학산신에게 제의를 지냈던 기록이 있다. 당시 안관당은 정면 3칸 정도의 규모로, 단지 김민선 부사뿐만 아니라 인천 관아와 지역민을 수호하는 문학산의 산신신앙이 그 바탕을 이루는, 관이 주도해 제의를 지냈던 사당 유적으로 보고 있다.

▲문학산성
문학산성(文鶴山城)은 문학산 정상 부분에 자리한 석성으로 '미추홀 고성', '남산성' 등으로 불리워 왔다. 삼국시대 초기에 축조된 테뫼식 형식의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문헌에 의하면 문학산은 미추왕(비류)의 도읍지로서 석성 터가 있고 성내에는 비류정(沸流井)이라는 우물이 있다고 기록이 돼 있다.

1997년 지표조사에 의하면, 처음에 토성이던 것이 삼국시대 말 혹은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석성으로 개축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내 시설물로는 우물과 봉수대, 안관당 등이 있었는데, 1962년 군부대 주둔으로 삭토되면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성곽 안쪽은 모두 군부대의 각종 시설물이 자리 잡은 상태라 잔존 유구 조사에는 어려움이 있다. 1986년 12월 인천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문학산 일대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고인돌과 각종 석기류와 무문토기편 등이 출토됐고, 삼국시대 이래 문화·행정의 중심지가 형성돼 1883년 인천 개항과 더불어 인천의 읍치가 현재의 중구로 옮겨지기 전까지 원(原)인천지역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문학산 일대는 그 역사적 원형을 상실했다. 광복 후, 1949년에 '문학산 방면 고적전설조사보고서'를 통해 둥근형의 우물지나 토축의 봉수대 등 그 원형 일부 파악했지만, 1962년 미군부대에 이어 1979년 한국군이 주둔하고 부대시설이 들어서면서 변형됐다. 군부대 지역을 제외하고 문학산이 개방되기는 했지만, 문학산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1997년 '문학산성 지표조사'를 토대로 이후 지금까지 문학산성 보존, 등산로 정비 및 탐방로 조성을 통해 시민들의 관심과 문화재적 가치가 점차 증폭되고 있고, 군사지역 해제를 통해 인천시민의 품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문학산'은 비류의 미추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030년이 넘는 인천 역사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소중한 공간이다. 인천 시민들이 그 역사적 의미를 알고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때 비로소 인천의 정체성도 정립될 것이라 생각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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