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넷 '트로트 엑스'가 배출한 스타…"'뽕짝'은 인생의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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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사 셔츠를 입고 코믹한 댄스를 추며 방실이의 '서울 탱고'를 구성지게 부른 이 남자.

지난 6일 종영한 엠넷 트로트 서바이벌 프로그램 '트로트 엑스'가 배출한 스타인 미스터팡(본명 방준호·38)이다. 재미있는 외모에 독특한 패션으로 주체할 수 없는 '뽕끼'를 발산해 '트로트계 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트로트 엑스' 내내 우승 후보로 꼽힌 그는 준결승에서 최고 점수를 받으며 결승에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우승 상금 5억 원을 놓쳤다. 그러나 시청자들에게 임팩트 강한 도전자로 눈도장을 찍은 덕에 요즘 행사 출연료가 오르고 광고 섭외까지 들어오고 있다. 심사위원인 태진아는 "미스터팡이 가장 큰 수혜자"라고 꼽았고 박명수는 "'트로트 엑스'의 흥행 보증수표"라고 치켜세웠다.

최근 종로구 수송동에서 만난 미스터팡은 무대에서 보여준 개구진 모습과 달리 진지하고 점잖았다.

그는 "'자옥아'를 부른 결승 무대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며 "경연곡 모두 손수 편곡했는데 '자옥아'는 가급적 원곡대로 가려고 밋밋하게 편곡한 점이 패착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프로그램 내내 편곡뿐 아니라 무대 콘셉트와 의상 등을 직접 연출했다. 온라인에서도 영상이 퍼지며 화제가 된 '서울 탱고' 무대 때도 노래 도입부에 고(故) 이주일이 유행시킨 팝송 '수지 큐' 멜로디를 넣고 망사 의상을 입는 아이디어를 냈다.

"트로트 가수는 반짝이 의상에 뻔한 음악을 한다는 선입견이 있잖아요. 튀고 싶어서가 아니라 트로트로도 다양한 무대 퍼포먼스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싸이 씨가 음악, 댄스, 패션 등 다채로운 요소로 대중을 사로잡았듯이 트로트 시장에도 그런 가수가 나와야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 같았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엠넷 '슈퍼스타 K'(2009) 준우승자 출신 조문근과 일대 일 배틀을 벌여 승자가 됐을 때다. 

그는 "밴드 생활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를 원없이 불렀다"며 "주위에서 상대가 세다고 걱정했기에 조문근을 꺾은 게 기분이 좋았다"고 웃었다.

인생역전까진 아니지만 프로그램 출연 효과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거리를 다니면 팬이라며 알아봐 주시는 분도 있고 행사 출연료도 좀 올랐어요. 치킨, 빨래방 등의 CF 제안도 들어왔고요. 고속도로에서 테이프를 판매하는 협회의 회장님이 꽃다발 들고 응원도 오셨고 그간 발표한 제 노래를 모아 편집 음반을 제작하고 싶다고도 하셨어요."

사실 미스터팡은 이미 여러 장의 음반을 낸 가수다. 지난 2006년 록 발라드인 데뷔 싱글 '그 곳으로…'를 냈고 이 곡으로 2007년 '제17회 KBS 목포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누나 한잔해'(2010)를 내면서 반응이 오자 본격적으로 트로트의 길에 들어섰고 '쌩유 베리 감사'(2012), '뜨거운 사랑'(2013)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음악을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의 인생은 그리 평탄하진 않았다.

경기도 동두천이 고향인 그는 중고교 시절 유도 선수 생활을 하며 경기도 대표로 활약했다. 고 3때부터 기타에 빠졌고 1998년 군 제대 후 미사리 다운타운에서 노래했다. 이때는 트로트 가수가 아니라 생계형 업소 가수였다.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하며 재미있는 캐릭터로 입소문이 났다. 이때 미스터팡이란 예명을 만들었다. "홍콩 스타 청룽의 아들 이름이 '팡쭈밍'인데 중국어권에서 '팡'에는 '개구쟁이', '뚱땡이', '재간둥이'란 뜻이 있더라. 또 내 성도 '방'씨이고 팡팡 튀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면서도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아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제대 후 미사리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할 때는 오후 5~7시 의정부 들어가는 도로에서 '뻥튀기'와 오징어를 팔았어요. 2시간 만에 15만~20만 원씩 벌었죠. 족발 배달도 해봤고 사업하는 친구들 일도 도왔어요. 심지어 친형이 하는 일을 도와 시신 염습(殮襲)을 해본 적도 있죠."

2002년 가정을 꾸려 두 딸을 얻은 이때부터 3년간 자동차 영업 사원으로 차를 팔고 저녁에는 라이브 클럽에서 기타를 메고 노래했다. 그는 "오전 8시에 출근해 새벽 1시에 귀가하며 3년간 미친 듯이 살아봤다"고 했다.

그러나 2010년 이혼을 하며 1년간 심각한 슬럼프에 빠졌다. 나이는 차고 음악은 해야 하는데 빛은 보이지 않았다. '트로트 엑스'에 출연하기 전 가정식 백반집을 하려고 가게 자리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의 끈을 놓기는 힘들었다.

그는 경제적인 위기가 없었다면 사실 트로트란 장르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는 "음악은 놓고 싶지 않았고 두 아이가 있으니 돈은 벌어야 했다"며 "처음엔 록과 발라드를 불렀지만 생계형 연예인의 길을 가기 위해 트로트를 자구책으로 선택했다. 처음엔 내가 트로트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무대를 즐기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트로트 엑스'를 통해 불황을 겪는 트로트 시장을 살리는데 일조하고 싶은 사명감을 갖게 됐다고 강조했다.

 "저로 인해 트로트를 좋아하는 분들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이젠 생계형 가수가 아니라 외면받는 이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싶은 목표가 생겼죠. 다른 장르의 가수들처럼 멋있는 무대 연출로 공연도 많이 해보고 싶고요."

지금의 그에게 '뽕짝'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그전까진 차에서도 트로트를 들은 적이 없다"며 "이젠 평생 나와 떨어질 수 없고 같이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의 동반자다. 요즘은 딸들도 트로트 메들리를 즐겨 부르는데 '트로트 엑스' 시즌 2를 하면 작은딸을 내보낼까 생각 중"이라고 웃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