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숭의동, 과거의 추억·현재의 풍경 로터리에서 돌고 돈다
빈집흉물 109번지 공방·영화제작소 변신

집회 열던 전도관 유명인사 거주한 명소

숭의청과물시장 한때 전국 상권 장사진

김균 후손 집성촌 여의실 역사속 흔적만


▲ 옛 숭의로터리에 있던 조형물
숭의동 교차로에는 오래된 로터리가 있다. 그 로터리를 돌면 여의실도 갔고 깡시장도 갈 수 있었다. 더 크게 돌면 '109번지' 전도관 동네와 옐로우하우스에도 다다른다. 한때 그 로터리를 돌아야 도심에서 교외로, 교외에서 도심으로 오갈 수 있었다. 도시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오늘도 숭의로터리는 하염없이 자동차를 원심력으로 돌리고 또 돌린다. 로터리는 과거의 추억도 현재의 풍경도 돌리고 있는데 숭의동의 시계 바늘은 멈춰 서있다.

사람은 밟고 있는 땅을 닮는다고 했던가. 쇠뿔고개, 황골고개라는 거친 옛 이름을 가진 숭의동 109번지는 지형만큼이나 거칠기로 유명했다. 창영동, 송림동 등 아랫동네 아이들은 그곳에 오르기를 극도로 꺼렸다. 한때 그 동네의 600여 가구 중 절반은 빈집이었다. 15년 이상 끌어온 재개발 계획은 계속 공수표만 날렸고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났다. 체온 없는 빈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소굴'이었다. 비행청소년, 술주정뱅이 그리고 쓰레기 더미가 집 하나씩을 차지했다. 주민들조차 자신의 동네를 무서워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동네가 점점 희미해질 즈음 예술한다는 사람들이 동네 언덕으로 올라왔다. 작가·화가·도예가·연극인 등 예술인의 영역도 다양했다.

그들은 빈집부터 알록달록 울긋불긋 총천연색으로 색칠했다. 그동안 너무 칙칙한 무채색에 둘러 싸여 살던 주민들을 위한 배려로 원색을 택한 것이다. 일단 겉모습으로 동네는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아예 몇몇 예술인은 짐을 옮겨와 눌러앉거나 빈집을 작업 장소로 쓰기도 했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해 20명의 예술인이 마을 주민이 되었다. 빈집이 공방으로, 영화제작소로, 작은 도서관으로, 게스트하우스로 변신했다.

대낮에도 돌아야 했던 경찰 순찰도 사라졌다. 문화마을로 알려지자 사람들의 발길이 늘었다. 골목마다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감탄사 그리고 웃음소리가 새나왔다. 순찰 대신 순례의 발길이 이어졌다.

우각로 문화마을 위쪽에는 성채와 같은 거대한 건물이 서있다. 흔히 '전도관'이라 불리는 건물이다. 전도관은 한때 인천의 랜드마크였다. 동인천, 주안, 개건너는 물론 앞바다 섬에서 인천 항구로 들어 올 때도 희미하게 전도관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 왔다.

그곳의 주인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맨 먼저 등장한 인물이 알렌이다. 선교사이자 의사로서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그는 1890년 고종황제의 땅 옆에 여름 별장을 지었다. 둥근 타워의 돔을 곁들인 2층 별장이었다. 1907년 알렌은 미국으로 귀국했고 그 자리를 이완용의 아들 이명구가 차지했다. 1927년에는 이화여전 출신의 이순희 남매가 그곳에 흔히들 개미학원이라고 불렀던 계명학원을 세웠다. 광복 직후에는 서울의 한 대학의 분교가 개교하기도 했다.

휴전 후, 한 종교단체의 집회가 남한 땅을 온통 휩쓸었다. 인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5년 9월16일 동산중학교 앞 넓은 벌판에 엄청나게 큰 천막들이 쳐졌다. 수없이 많은 솥단지들이 돌맹이 위에 올려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천막 안에서 열광적인 집회를 가졌다. 원래 닷새 예정이었으나 이틀을 연장하며 이곳에서 먹고 자며 밤낮으로 열렬한 집회를 가졌다. 그 집회를 인도한 사람은 바로 '불의 사자' '동방의 의인'이라 불린 박태선 장로였다. 그 종교단체 이름은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였다. 그들은 '공사집' '선교사 집'으로 불리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1957년 10월 전도관을 세웠다. 수많은 신도들의 벽돌을 이고 지고 언덕을 올랐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사방팔방 산 밑에서 개미처럼 꼭대기로 올라오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잖아. 새벽 4시까지 기도하던 그 소리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어, 옆집에 살면서 전도관에 다니던 경숙이 엄마는 소사신앙촌으로 들어간다며 이 동네를 떴는데 지금 어디서 사는지… "

40여년간 전도관 주변에서 살고 있는 장춘자(75) 할머니의 기억 속 한 줄거리다. 1978년 전도관은 이곳을 떠났다. 조 씨라는 서울사람이 이 건물을 매입했다. 6개월 정도 비어 있다가 신발공장 3개가 세 들어 왔다. 직공들이 많아 별도의 기숙사도 있었다. 2, 3년간 운영하다가 공장은 이전했다. 1984년 이 자리에 예루살렘교회가 들어섰다. 다시 열광적인 집회가 이어졌다.

9년 전 예루살렘교회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다시 전도관은 텅 비었다. 불 꺼진 성채는 을씨년스럽기조차 했다. 산꼭대기의 1700여평 땅은 한없이 넓어 보였다. 주황색의 양철 지붕에 올라가 보니 알렌이 왜 여기에 별장을 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이 육지로 많이 변했지만 월미도는 물론 멀리 인천 앞바다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 왔다. 갯바람이 코에 스치는 듯했다. 어디선가 울부짖는 기도 소리가 환청처럼 바람에 실려왔다.

숭의동에는 '여의실(如意室)'이란 동네가 있다. 현재의 남구청사와 청소년회관 일대를 일컫는다. 흔히 여우실이라고 부르는 이 동네는 조선왕조 개국공신 김균의 후손들이 600년 동안 살아온 경주 김씨의 집성촌이었다. 6선 의원으로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고(故) 김은하(1923∼2003) 씨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여의실에는 오랫동안 김씨 문중의 선영이 있었다. 일제 말이었던 1940년, 일본 사람의 거주지가 도심에서부터 점점 확장해오면서 현 숭의로터리 일대까지 밀려왔다. 주변에 도로가 뚫리고 선영과 마을이 두 동강 나자 선영을 시흥시 미산동으로 이장했다. 1996년에 종가와 사당마저 헐리게 되었고 그 자리에 남구청 종합민원실이 들어섰다.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던 종가 터에 지난 2006년 11월 여의실 문중 종친과 남구학산문화원이 주축이 돼 표지석 하나를 세웠다. 현재의 민원실 바로 앞이다.

인천남중학교 후문 가까이에 있는 여의실 경로당에서 김용식(82)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이곳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여의실 토박이다.

"이 일대가 온통 배밭이었어요. 저기 시온교회가 들어선 자리는 배밭 주인이 살던 집이고. 남구청 밑으로는 온통 미나리깡이었지. 어렸을 적에는 거기서 붕어와 미꾸라지 잡아먹곤 했어요. 한때 구청 자리에 미군이 포를 설치하기도 했고."


▲ 옛 인천교대 건물
옛 인천교대 터도 여의실 문중의 땅이었다. 개성공립사범학교는 6·25 전쟁으로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숭의초교 교실 몇 개를 빌려 쓰고 있었다. 문중은 개성사범학교를 인천으로 유치하기 위해 땅을 내놓았다. 학교는 1953년 4월 숭의동 203번지에 부지를 확보한다. 당시 그 땅은 야산이었고 다른 한편은 온통 미나리밭과 물구덩이었다. 학생들은 방과 후는 물론 일요일에도 등교하여 땅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 이 학교는 인천사범학교에서 인천교육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오늘날의 경인교육대학교로 발전했다.

1990년 인천교대가 계산동으로 떠난 그 자리에 남구청과 청소년회관이 들어섰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교대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일자형 건물이다. 한눈에 봐도 주변 건물과는 사뭇 다르다. 건물 모퉁이에 머릿돌이 박혀 있다. '단기 4289년 9월'로 돼있다. 1956년에 세워진 건물로 현재는 청소년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던 회랑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은 청소년회관과 남구의회 청사를 이어주고 있다. 옥상에 오르니 옛 교사(校舍)의 모습이 더 뚜렷하다. 이런 이유로 영화제작 관계자들의 발길이 심심치 않게 이어지고 있다.

"거의 다 그대로예요.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 손상된 게 별로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선배들에게 수업 후는 물론 체육시간에도 체력단련으로 벽돌을 날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1967, 68년에 이곳에서 공부했던 6회 졸업생 김병진 씨(한국우주소년단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숭의 깡시장이 있었다. 한동안 인천시민의 농산물 공급을 책임지던 숭의철교 옆 도매시장이었다. 지금은 '숭의청과물시장'이란 이름이 붙은 4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작은 시장이다. 1970~1980년대 까지 만해도 인근의 김포, 강화는 물론 충청도, 전라도에서 신선한 청과물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중개인의 경매 외침소리가 매일 새벽을 깨웠다. 길 건너편을 포함해 주변에 100여개의 가게가 문을 열었고 철교 밑에도 노점이 장사진을 쳤다. 이제는 15여개의 가게만 문을 열 뿐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은 시장이 되었다.

시장에서 철도길 따라 도원역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가로수 공원에 사람 키를 훨씬 넘는 돌 하나 세워져 있다. '한국철도 최초기공지' 표지석이다. 1897년 3월22일 중절모를 쓴 서양인과 도포를 입은 조선인 등 수십 명이 구릉에 모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2년 후 1899년에 개통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 기공식 첫삽을 떴다. 그 삽질이 한국철도 110년의 초석이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 표지석이 세워진 곳은 기공식 첫 삽을 뜬 곳이 아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400여미터가 정확한 장소라고 표지석에 써 있다. 그러니까 현재 진로아파트 남쪽 부근 숭의철교에서 박문삼거리로 가는 도로가 올바른 자리로 추정된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다복아파트
일제강점기 다복아파트 터에는 면화(솜)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이 있었다. 여기서 생산된 물품은 남구청 건너편에 방공호 등 그 흔적이 현재도 남아있는 마굿간으로 옮겨졌다. 마굿간은 일종의 물류창고였다. 마차로 수인선 남부역으로 운송돼 인천항역을 거쳐 선박으로 일본이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구청 주변에는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주했던 나가야 영단주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다복아파트는 군수공장 터에 1975년 10월 준공되었다. 인천개발공사에서 다복맨션아파트라는 명칭으로 100가구를 분양했다.


▲영제한의원
1945년 이전부터 대를 이어 내려오는 한의원이다. 70년 가까이 전수된 우강침법과 보뇌환 등으로 각종 희귀질환 등을 치료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한의원의 전신인 영제한약방을 개설한 우강 노학영은 1960~1970년대 당시 지역 내 기탁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9년 6월 수봉공원 팔각정 건립에도 1504만원을 기탁해 팔각정 이름은 그의 호를 딴 우강정(佑江亭)이 되었다.


▲우각역
우각역은 주위에 민가가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알렌만을 위한 역이었다. 알렌이 자신의 별장을 오르기 위해 정차한 역으로 역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 사진도 없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선로가 직선화되면서 숭의동 쪽으로 지나가자 이 역은 존재 가치가 없어져 1906년에 사라진다. 숭의동 109번지 자동차정비소 뒤쪽 골목길에 선로가 지나갔던 축대 흔적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