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화평동, 냉면·함세덕 …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동네


인심 넉넉 '세숫대야냉면' 재개발로 10여 곳 명맥 

월북극작가 '함세덕 생가' 잊혀진 채 방치 아쉬워

'박정희 할머니' 20년 넘게 보통사람들에 그림교육




시내 중심지에서 비켜 서있던 화평동이 언제부턴가 전국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요리책 어느 페이지에도 없었던,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냉면의 발생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냉면 삶는 냄새를 뒤로 하고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우리는 인천이 낳은 극작가 함세덕의 발자취를 쫓을 수 있다. 비가 오면 인천 곳곳을 거쳐 온 빗물이 바다로 모였다. 화평동에서 태어난 이들은 거친 바다로 향하는 빗물처럼 세상에 나가 그 이름을 남겼다.


화평동 냉면은 전통적인 함흥냉면이나 평양냉면 측에서 보면 '이단아'라고 할 수 있다. 지름 30㎝ 가까운 세숫대야처럼 생긴 그릇을 접한 순간 모두들 '서프라이즈' 했고 처음엔 순전히 이 특이한 그릇 때문에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맛도 뒤지지 않는다. 고추장 양념과 오이, 무. 열무, 깨 등의 채소 고명의 조화는 특유의 얼큰하고 시원한 맛을 자아내고 있다.

 

   
▲ 화평동 냉면거리.

1970년대 말경 인근 화수시장에서 서 너 평 정도의 소규모 냉면집을 운영했던 상인들이 동인천역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에 하나 둘 개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냉면골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인근 대성목재, 동일방직, 인천제철 그리고 인천항 부두 근로자들이 작업복 입은 채로 허름한 냉면집을 찾았다. 한창 때는 새벽 6시 동틀 무렵에 가게 앞에서 문 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원한 냉면으로 해장도 하고 배도 채우기 위해서다.

당시 인천 냉면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경인면옥 냉면 값이 4500원 할 때 이 동네는 500원짜리 냉면을 팔았다. 지금은 4000원. 아직도 30년 전의 경인면옥의 냉면 값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가격에 비해 양은 풍성했다. 엄청난 양을 담기 위해서 두터운 스텐레스 재질의 양푼을 금형 떠서 특별 주문했다. 국물을 들이키려면 얼굴이 푹 빠져 세숫대야와 다를 게 없었다. 전성기 때는 골목 양쪽으로 23개나 있었던 냉면집이 이제는 10여 곳만 남았다. 이마저도 곧 불어 닥칠 재개발로 인해 자리를 지키며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철길이 넓어지기 전 현재의 냉면집 맞은편에는 양화점과 양복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양화점은 주로 맞춤과 기성품을 병행하는 집이었다. 특히 인근에 공장들이 많이 있었던 까닭에 군화를 물들인 안전화를 많이 팔았다. 기성화를 갖다가 파는 구둣방도 몇 집 있었다. 길 한쪽 편이 통째로 철거되었다. 이곳 양복점들은 경동거리 양복점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B급이랄까. 간판도 내부 장식도 화려하지 않은 동네 양복점이었다. 럭셔리 고급 양복이라기보다는 서민들이 마음먹고 한 벌 장만하는 수수한 양복들을 만들었다.

이들 틈에 솜틀집들이 있었다. 그중 인천에서 가장 오랜 솜틀집은 '은율면업사'. 황해도에서 피난 온 박재화 씨는 고향 은율에서 하던 목화업을 이어가 이곳에서 은율면업사를 열었다. 아들 박현석 씨 그리고 손자 박길주 씨에 이르기까지 지난 2000년까지 3대째 솜틀집을 운영하였다. 10여 평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기계는 기름때 묻은 솜틀기계 하나. 1960년대 방직공장에서 쓰던 중고를 사다 개조한 것이다.

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민들이 사용하던 이불속 목화솜을 가지런히 펴는 작업에 정성을 다했다. 솜뭉치 속에는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과 추억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겨울 엄동설한에 연탄불도 없는 구들장에서 온 가족이 한 이불에 덮고 자던 기억, 가난한 살림을 줄여 큰맘 먹고 첫 신접살림으로 장만했던 일 등 솜이불에는 우리의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이제 솜 트는 기계 소리를 더 이상 화평철교 인근에서 들을 수 없다. 그들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은율면업사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솜틀기계는 그들의 유언대로로 송현동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 기증돼 전시되고 있다.


 

   
▲ 지금은 폐업한 소주방이 자리한 골격만 남은 함세덕 생가.

화평동을 냉면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아쉬운 동네다. 화평동 골목에는 우리나라 연극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의 태가 묻혀 있다. 골목 어귀에서 오래된 기와집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 이 동네를 거닐다보면 '함세덕'이란 이름 석자와 만나게 된다. 극작가 함세덕(1915~1950)은 1915년 화평동 455번지에서 태어났다. 1936년 조선문학에 희곡 '산허구리'를 발표하면서 연극계에 명함을 내민 뒤 39년 1막짜리 단막극 '동승'으로 일약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무의도 기행' '도념(道念)' '해연' 등 20여편의 역작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혼돈기에 나온 그의 작품은 가난과 자유가 주 테마였고 토속적이고 때론 치열한 서정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시대를 초월한다. 그러나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40여 년 간 우리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한 '함구(緘口) 대상' 작가였다. 그의 생가가 궁금했다. 번지 주소와 사진 한 장만 갖고 탐문한 끝에 마침내 생가를 찾아냈다. 반가움도 잠시, 폐업한 소주방으로 변해 버린 집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옥상에 올라가서 뒷집을 좀 내려다 볼 수 있을까요"

"뒷집에 뭐 볼게 있다고…".

뒷집의 '정체'를 몰라 마뜩찮은 눈치를 보이는 집주인 아줌마의 시선을 뒤로 하고 그 집 옥상에 올라가서 생가를 내려다보았다. 낡았지만 조부 함선지, 부친 함근욱 2대가 누린 68평의 한옥 기와집의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다.

옥상에서 보니 기다란 경인선 철도길이 한눈에 들어 왔다. 그는 이른 새벽 화평철교를 털컹거리며 지나는 철마 소리에 잠을 깨고 수문통에서 묻어나온 바다 특유의 내음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화평동의 바람과 냄새는 그의 작품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1935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詩) '고개'는 19세까지 인천에 머물렀던 시절에 쓴 것이다. 이 '고개'가 혹시 집 앞 '화도고개'를 맘에 두고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앞서 나간 것일까.


 

   
▲ 평안 수채화의 집.

냉면 골목 중간쯤, 주위 분위기와 동떨어진 4층짜리 건물이 있다. 입구에는 '평안수채화의 집'이란 나무 간판이 걸려 있다. 수채화가 박정희(90) 할머니가 거주하며 이웃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집이다. 박 할머니는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만든 송암 박두성 선생의 따님이다. 송암 선생과 함께 율목동에 살다가 결혼해서 1949년부터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 목조 건물이었던 것을 의사 남편 유영호 박사(작고)가 콘크리트 건물로 짓고 '평안의원'이란 간판을 걸었다. 지금은 건물 외벽 전체에 당시 평안의원의 모습과 의사 가운을 입은 남편 유영호 박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당시에는 이 건물이 제일 높았겠네요"

"지금도 제일 큰데… 내가 이 동네 터줏대감이여."

예순이 넘은 나이에 화가로 정식 데뷔한 그가 그동안 키워 낸 제자는 200여명. 붕어빵 파는 아주머니, 공장 노동자, 주부, 학생 등 지위 고하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이 안에선 모두 '평안한' 예술가였다. 박 할머니는 아직도 현역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일년에 50점 정도를 그린다. 전시회를 통해 마련한 그림값은 시각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기꺼이 내놓는다. 수채화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그가 정작 주위와 나누고 싶었던 건 그림이 아니라 사랑인 듯했다.

동인천역과는 지척이었지만 철로로 막혀 있어 변두리로 치부되었던 화평동에도 한때 인천극장이란 영화관이 있었다. '인천'이란 지명의 이름을 딴 극장임에도 불구하고 이 극장은 삼류극장 동시상영관이었다. 동인천 주변의 개봉영화관과는 달리 서울에서 이미 개봉이 끝나 스크린에서 내려버린 영화 두 편씩을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화수동, 만석동, 전동의 꼭지점 역할을 하면서 '변두리의 중심지'였던 극장 주변은 바로 앞에 화수자유시장이 자리 잡고 있어서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건달들도 등장했다. 가끔 인천극장 앞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지역 신문을 장식하곤 했다. 지금은 마트, 헬스센터 등 복합상가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그 극장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곳>

 

   
▲ 옛 화평철교.

▲화평철교
옛 인천여고 앞길에서 송현동으로 가는 내리막에 있는 경인선 철교를 말한다. 당초 철로는 1899년 동인천역 앞 대한서림 쪽으로 휘어져 있었는데 1900년도 일본철도운송조합에서 직선화하며 이 철교가 생겼다는 설이 있다. 경인선 개통 당시 약 7.5m로 자동차 두 대가 교차하기에는 쉽지 않은 철교를 1964년 11월 폭 20m(차도 14m, 보도 3m) 폭으로 확장했다. 이후 약간의 확장 공사를 하면서 오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 옛 인천극장.

▲인천극장
동인천 부근에 있었지만 동시상영관으로 삼류 취급을 받았다. 한때 불량배가 많기로 소문난 극장이었다. 1955년 3월 이민 씨와 김태훈 씨가 연극 전문극장으로 개관하였다. 이듬해 1956년 4월 24일 화재가 일어나 전소되었다. 1960년대 시민극장에서 인천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해오다 2001년 9월에 문을 닫았다.

 

   
▲ 삼화목욕탕.

▲삼화목욕탕
화평동 만화로 사거리에서 송현초교로 가는 좁은 골목길에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 개장한 목욕탕이다. 그동안 주인은 몇 번 바뀌었지만 한 장소에서 계속해 영업을 한 목욕탕으로 현재 인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현역'으로 추정된다.

▲함세덕 희곡집 '동승'
문화재청은 함세덕의 희곡집 '동승' 초판본을 근대문학유물로 목록화 했다. 이 작업은 개화기부터 1950년대까지 발간된 문학관련 저작물 중 문화재로서 연구·보존 가치가 높은 작품을 선별하는 것이다. 그의 희곡집에는 '동승' '무의도기행' 등 5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각 작품 첫머리마다 홀수 별면에 삽화를 넣어 극의 배경을 짐작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