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환 박사의 인천史 산책-12
온몸으로 느낀 질곡의 역사 …'평생 친구' 유완무와의 인연
   
▲ 1946년 11월 강화의 김주경 집을 방문한 백범                    /자료=정부기록사진첩


지난 10월15일은 제49회 인천시민의 날이었다.

시민의 날은 역사상에 인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날을 기념해 제정한 것인데, 올해가 바로 '인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사용된 지 600년을 맞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인천시는 '인천광역시사'를 10년 만에 새로 발간하는 한편,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을 선정하는 작업을 벌여 왔다.

그 결과물은 지난 15일 '인물로 보는 인천사'라는 책자로 발간됐다. 인천발전연구원 도시인문학센터 연구진과 자문위원, 그리고 네 명의 집필위원이 자문과 토론, 자료수집과 집필과정을 거치면서 전근대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 97명을 선정했다.

물론 97명이란 인물로 인천사가 다 드러날 수는 없다. 아울러 짧은 기간 진행됐기에 추가 인물의 발굴과 연구가 이뤄져야 함은 물론이다.('인물로 읽는 인천사', 인천광역시, 2013 참조)

인천인물 선정 과정에서는 여러 논란이 불거졌다.

특히 우리 역사의 격변을 반영하듯, 한국사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친일부역을 하거나 월북해 북한정권에 가담한 이는 배제했다.

또 하나는 인천인물의 범주를 어떻게 잡는가 하는 문제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논란을 빚은 인물이 바로 백범 김구이다.

상해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은 인천에서 태어나지도 않고, 주 활동무대를 인천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필자는 백범 선생을 인천의 인물로 선정해 집필했다.

백범은 자서전 '백범일지'에 인천을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기록하고 있다.

김구는 조선이 강제 개항되던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만 20세 나이에 치하포에서 국모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일본군 토전양량(土田壤亮)을 때려죽이고 붙잡혀 인천감리서 감옥에 투옥되면서 인천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재판장에게 일본의 침략주의를 꾸짖는 김구를 도우려고 가장 먼저 강화 출신 김주경(金周卿)이 헌신적으로 나섰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주경은 김구 부친과 모친을 번갈아 가며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법부대신인 한규설을 만나 김구의 충의(忠義)를 표창해 석방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요청이 받아들이지 않자 김주경은 자신의 재산을 풀어 7~8차례나 법부에 소장을 올렸다.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김주경은 김구에게 탈옥을 권유하는 단율의 시 한 수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김구의 구명을 위한 김주경의 노력도 소중하지만, 탈옥 후 그의 도움을 잊지 않고 김주경의 집을 찾아 나선 김구의 행적도 주목된다.

망해가는 김주경 집안을 찾은 김구는 김주경 아들 윤태와 둘째 동생 무경의 두 아이를 데리고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인근 30여명의 아이를 대상으로 수업료도 받지 않고 3개월 이상을 성심성의껏 교육했다.

김주경 형제 이외에도 청년 김창수(김구)를 도운 인천의 인물들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김주경에 이어 두드러진 인물은 인천 시천동 출신의 유학자 백초(白樵) 유완무(柳完茂)이다.

김주경이 시도한 법률적 사면이나 뇌물을 바치는 일 등이 모두 어렵다고 안 유완무는 용감한 청년 13명을 뽑아서 모험대를 조직해 인천항 주요 지점마다 밤중에 석유통을 지고 들어가 7~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깨서 김구를 구출하는 계획을 짰다.

김구가 먼저 탈옥하는 바람에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유생들의 비밀결사를 이끌었던 유완무는 김구를 수소문해 만나 민족운동을 도모하고자 했다.

'김창수'란 김구의 아명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고 해서 이름을 김구(金龜)라 고쳐준 이도 유완무다.

유완무가 을사보호조약 체결 직후 김구보다 앞서 북간도로 망명해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피살돼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김구는 유완무를 "평생 친구"라고 백범일지에 기록했다.(더 자세한 내용은 졸고, '백초 유완무의 생애와 민족운동', '인천학연구' 10호,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9)

백범과 인천의 인연은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됐다. 김구는 1911년부터 안명근사건과 신민회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14년 인천감옥으로 다시 이감돼 축항공사에 노역했다.

질곡의 역사를 인천 감옥에 갇혀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려는 뜻과 구상을 바로 인천에서 마련했다.

이에 대한 더 깊은 연구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마침 2015년 6월에 인천내항 8부두가 친수공간으로 개방될 예정이다.

인천대공원 구석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부터 내항으로 옮겨 파란만장한 인천항의 역사를 굽어보시도록 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