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12
   
▲ 중구 인현동에 위치한'용동큰우물'


용동은 인접 마을들처럼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1903년 8월 개항장 일대에 부내면을 신설하고 선창리를 분할할 때 용동(龍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싸리재가 있는 용동 뒷산을 용산(龍山)이라고 한다.

그러나 용동 지명은 산보다는 큰우물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민속학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큰 우물의 주인은 용이다.

큰우물 때문에 용을 상상해 용산이라는 지명이 붙었고 마을 이름도 용동, 용리가 됐던 것이다.

옛날 북성포 쪽에서 왕도인 한성으로 가려면 싸리재 산등성이 길을 타고 넘어갔다.

그 왼쪽 골짜기에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한 큰 우물이 있고 주변에 자연취락이 형성돼 있었는데, 그곳이 용동이다.

조선 왕조 말기에 인천에 사람 왕래가 많아지자 인천부는 1881년 우물을 정비하고 자연석을 다듬어서 멋들어지게 원형으로 쌓아올렸다.

한성으로 가는 나그네들이 목을 축이고 갔다.

은자(隱者)의 나라를 찾아온 외교관이나 선교사들도 이 물을 마셨을 것이다.

감리서 감옥에 두 번이나 갇혔던 백범 김구 선생도 아마 이 물을 마셨을 것이다.

개항 직후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생긴 점포들이 탁포(신포동)와 내리(내동), 외리(경동)에 저자를 형성할 수 있던 것도 이 물맛 좋은 우물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영양조장, 인천양조장 등 인천의 큰 양조장은 물론 일본인들의 사케 양조장에서도 이 물을 길어다 술을 만들었다는 원로들의 증언을 필자는 여러 번 들었다.

1914년 인천부가 정(町)·리(里)를 정리할 때 인근 마을들은 본정(중앙동), 산근정(전동), 지나정(선린동), 사정(답동), 항정(항동)으로 일본식 지명이 붙었으나 용동은 내리·외리와 함께 용리(龍里)라는 지명으로 살아남았다.

개항 직후 급조된 지명이 아니라 오랜 세월 유지해온 재래지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7년에는 용운정(龍雲町)으로 바뀌고 말았다.

무수한 지명을 일본의 위인과 군함 이름을 따거나, 일본에 흔한 지명을 따다 붙였는데, 이곳은 그러지 못했다.

큰우물이라는 저명한 지형지물이 있고, 워낙 선명한 유래를 갖고 있어서였다.

8·15 광복 후인 1946년 용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1977년 내동 경동과 합해 내경동으로 통합되고 1998년에는 인현동과 묶여 동인천동이라는 행정동에 포함됐다.

큰우물거리를 비롯한 용동거리가 크게 발전하고 번잡해진 것은 1900년 개통한 경인철도의 축현역이 가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기차에서 내려 음식을 먹거나 술 한 잔 걸치기에 좋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세권으로 발전하면서 요릿집과 기생집들이 들어섰다.

용동 큰우물은 인천의 젖줄이었으며 생명도 길었다.

근래 수돗물이 보급된 후에도 중요한 식수원이었다. 물맛이 좋고 가물이 들어도 용출량이 줄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는 소년기이던 1950년 후반 서곶에서 백일장에 나가느라 다운타운에 왔다가 처음 이 물을 마셨다.

1960년 상인천중에 입학해 매일 동인천역에서 버스를 내려 채미전거리를 지나 율목동 초입에 있는 학교까지 갔다.

목마를 때면 찾아가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그때도 물을 실어가는 양조장이나 간장공장 물수레들을 볼 수 있었다.

1970년대 큰우물거리에 가면 오래된 기생집의 후신인 방석집들이 남아 있고 제법 장고를 치는 늙은 기생들도 있었다.

클라리넷을 부는 늙은 악사도 가끔 왔다. 거기서 소성약주를 마시고 2차로 맥주집 화백이나 로젠켈러로 갔다. 그때가 큰우물거리 전성시대의 끝이었다.

토박이 인천인들의 추억이 서린 큰우물은 음용 부적격 판정을 받아 폐쇄됐지만 외형은 130년이 지난 지금도 견고하며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인천의 명필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 선생이 쓴 '용동 큰우물'이라는 현판을 단 정자도 그대로 있다.

최근 중구청이 주변을 정비해 멋진 쉼터로 만들었다.

매년 가을 대동굿을 벌이던 큰우물제가 무슨 이유에선지 2, 3년 전 중단됐는데 다시 열었으면 좋겠다.

인천문화의 한 근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