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인문학적'교동 관방체제 역사'토론회삼국사기에 표현 관미성과 교동도 지형 일치
아직 유물 발굴 못해 … 상세한 발굴조사 절실

   
▲ 한기출 교동문화보존회장(사진 맨 왼쪽)의 설명을 김창수(왼쪽 두 번째부터) 인천발전연구원 도시인문학센터장과 최중기 인하대교수, 이수용 우이령보존회장, 이세기 시인, 민운기 스페이스빔대표 등이 듣고 있다. /사진제공=인천발전연구원 도시인문학센터

인천도서연구모임(이하 섬연구모임) 첫 섬 답사 일정이 지난 19일 교동도에서 진행됐다. 섬연구모임은 인천발전연구원 도시인문학센터와 함께 교동도의 역사적가치와 인문학적, 생태적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해 이번 현장답사를 진행했다. 이번 답사에서 섬연구모임 회원들은 교동향교를 시작으로 연산군 적거지와 동진나루, 북진나루 등과 함께 옛 백제 관미성으로 추정되는 화개산성을 탐사했다.

특히 19일 저녁 숙소에서 진행된 인천발전연구원 도시인문학센터 세미나에서는 '교동 관방체제의 역사'라는 주제로 왜 교동도가 옛 백제 관미성으로 추정될 수 밖에 없는 지에 대한 논의와 토론을 나눴다. 토론내용을 요약한다.

 ▲화개산성은 관미성일까

화개산성은 교동도 동쪽 내륙 중앙에 위치한 화개산(해발 259.5m)에 위치한 내·외성을 갖춘 포곡식 산성으로 총 둘레가 2168m에 달한다.

내성 둘레는 1103m, 외성은 1155m다. 남쪽으로 산 정상부 절벽으로 자연성채로 이용되며, 북쪽은 화개산 북쪽에 걸쳐 석축구조를 갖추고 있다.

화개산성은 동서의 길이에 비해 남북길이가 긴 형태로 축적됐다.

최근 조사결과에 외성에 북문과 동문, 서문이 있었고, 내성에 북문과 서암문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산성이 언제 축조됐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화개산에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1565보이며 내부에 연못과 샘이 1개씩 있다"는 기록이 있어 세종 이전에 축조됐던 것으로 보인다.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 바다로 둘러싸인 관미성
삼국사기에서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4만 군사를 이끌고 석현(石峴) 등 10여성과 한수 이북 백제 부락을 함락시킨다.

그런뒤 그해 10월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인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킨다는 내용이 나온다. 인천섬연구모임은 백제 관미성이 인천 교동도라고 비정한다.

사면이 바다에 둘러쌓여있고 교동도 화개산성의 모습이 삼국사기에 표현된 관미성과 일치한다는 생각에서다.

도시인문학센터 세미나에서 '교동 관방체제의 역사'라는 주제발표를 시작한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교동도를 포함한 인천연안은 5세기 중엽까지 백제 영역에 속해있었다"며 "비교적 안정적 상황을 지속할 수 있던 인천연안이 영토분쟁에 휩싸인 것은 4세기 말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정책이 본격화되면서부터다"는 말로 발표를 시작했다.

광개토왕 2년(392년) 7월 고구려군은 4만의 병력으로 백제를 공격해 석현(石峴) 등 10여성과 한수 이북 백제 부락을 함락시켰다.

이후 10월에는 관미성(關彌城)을 20일동안 7개 방면으로 공격해 함락시킨다.

배 학예관은 "광개토왕이 함락시킨 백제영역은 대개 한강 유역으로 비정하고 있고 교동도를 포함한 인천연안도 여기에 포함됐을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실제로 고구려가 함락시킨 백제의 성 중에서 인천 영역으로 확실한 것은 396년 남진 때 빼앗은 58성 중 하나인 미추성(彌鄒城)이다.

당시 인천의 지명이 미추홀(彌鄒忽)이었던 것을 감안할 경우 미추성의 위치가 인천이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일치된 견해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관미성의 경우 그 위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19세기 고산자 김정호가 파주 오두산성(烏頭山城)을 관미성으로 비정한 이후 연구자들은 교동도와 강화도 봉천산, 예성강 하구 등이 옛 백제 관미성이 있던 위치로 추정하고 있다.

교동도를 관미성으로 비정한 연구자들은 392년 7월 광개토왕의 1차 남진 당시 예성강 부근 석현성 등 10성을 먼저 함락시킨 뒤 10월 관미성을 함락시켰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교동도가 관미성일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특히 삼국사기에 '사면이 깎아내린 듯 가파르고 길이 끊어진 해수로 둘러 쌓여있다'고 기록된 것을 근거로 교동도가 관미성으로 비정되고 있지만 이 경우 교동도에서 그 대상이 될 곳은 화개산성이 유일하다고 배 학예관은 설명한다.

 

   
▲ 눈 쌓인 수풀사이로 보이는 화개산성 유적. /사진제공=인천섬연구모임 이수용 우이령보존회장

▲교동도에 대한 조사 좀 더 활발해야.

교동도를 관미성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교동도에서 발견된 유물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것 뿐이다.
특히 관미성으로 비정되는 화개산성에 대한 연구조사는 활발하지 못하다.

배 학예관은 "화개산성에 대한 조사는 2000년 이후 몇 차례 지표조사와 현황조사만 실시됐을 뿐"이라며 "여기서 수습된 유물들은 대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유물이라 이것만으로 화개산성을 관미성으로 비정하기 어렵다"는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그는 지리적으로 요충지였던 교동도가 관미성일 가능성이 높은 만큼 화개산성을 비롯한 교동도에 대한 상세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이와 달리 현지 주민들은 교동도가 관미성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특히 현재 남아있는 화개산성은 관미성의 내성으로 외성은 교동도를 포함해 현재 정주갯벌까지 이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한기출 교동문화보존위원회장은 "예전에 교동에서 발굴된 유물로는 청동·철재 화살촉과 삼족오형 자기향로, 고대 부처상 등이 출토된 적이 있다"며 "교동은 예성강과 한강, 임진강이 하류가 만나는 지리적 요충지였던 것을 감안하고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난 지형적 특성에는 오두산성보다 화개산성이 더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현재 관미성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부분에 대해 "교동은 옛부터 석재가 부족했던 것을 감안할 경우 관미성은 석축성이 아닌 목책성과 토성이 함께 어우러져 지어진 성일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래서 현재 그 흔적을 찾기 힘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상우기자 theexdu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