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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최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제 연행됐다는 사실이 문서로 확인되지 않았고, (일본측)증언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는 2007년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한 망언과 맥은 같지만, 투박한 그 때와는 달리 간교함까지 깔려 있다. ▶"문서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모종의 확신에서 나온 말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보면 일종의 사언(詐言)인 것이다. '문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음을 알면서 그를 기화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에겐 신(神)인 '천황폐하'의 군대가 항복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천황' 히로히토는 무조건 항복을 했고, '식민지 조선'에 나와 있던 일본인들은 그날로 패닉상태가 돼 우왕좌왕했다. ▶민간인들은 본국에 송금하기에 바빴고, 군인과 관료들은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미군이 상륙하기 전 각종 서류와 문서를 모조리 소각한 것이 최우선적으로 한 일이었다. 식민통치의 만행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재인천 일본인들이 훗날 펴낸 '인천 인양기(仁川引揚記)'에도 실상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인천의 각급 관공서와 군부대 굴뚝에서는 한동안 검은 연기가 치솟아올라 하늘을 뒤덮었고, 그렇게 조직적으로 파기된 식민통치 자료들은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었다. ▶노다 총리의 "증언도 없었다"는 주장 역시 사언이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증인'으로서 엄연히 생존해 있음은 물론이고, 일본의 양대 유력지 조일신문이 1988년 발행한 조일백과 제119호 '대동아공영권' 편에도 증언이 실려 있다. ▶일본 시모노세키 지역 동원부장이었던 요시다는 "총독부가 경관을 동원하여 어린 여성을 강제적으로 한 마을에서 3~5명 혹은 10명씩 연행해 200여명쯤 되면,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보내왔다. 그러면 그들을 수송선에 태워 중국이나 남방의 전선으로 보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 호북성 무한병참사령부의 전 위안계장이었던 야마다도 같은 책에서 "위안부대는 군이 직접 감리한 조직으로 외국군대에는 없는 일본군 독자의 구조"였다고 말하고 있다. 노다 총리가 듣고 본 것은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