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람'을 한 주 쉬었다. 민망한 소리지만 휴식이 필요했다. 어느 순간 매일 책을 읽고, 지리멸렬한 삶과 맞서는 것이 고욕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 나는 필리핀 북부 산악지역인 바나웨이(Banaue)의 논길을 걷고 있었다.

바나웨이는 손바닥만 한 산간 마을이지만 그 일대에는 유네스코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한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 우리말로 '계단식 논'이 끝없이 그리고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곳이다. 해발 1500m가 넘고 인간과 가축이 다닐 수 있는 길이라곤 없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오로지 인력의 힘으로만 산을 깎고, 땅을 갈고, 돌을 쌓아 만든 계단식 논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계단씩 형성되었다고 한다. 논 한 계단을 만드는데 30년이란 세월이 흐른다고 하는데 그곳에 끝없이 펼쳐진 계단식 논은 높이가 100여층에 이르는 곳도 있다.

나는 바나웨이에 가기 위해 한때 미공군의 아시아 최대 기지였던 엥겔레스(Angeles) 시티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그곳에서 출발해 마발라캇(Mabalacat) 시티의 다우(Dau) 터미널에서 중간 기착지인 바기오(Baguio) 시티 행 버스 빅토리 라이너를 잡아탔다. 내게 바기오는 두 번째 방문이었다. 바기오는 해발 1500m에서 2000m에 형성된 고산 도시이다. 바기오는 미군의 휴양지로 계획되어 만들어진 덕분에 가로가 깨끗하고 정비가 잘 되어있다.

바기오 시티의 빅토리 라이너 터미널까지 버스로 6시간이나 걸렸다. 바기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캄캄한 고산지대의 어둠이 내렸고 제법 차가운 이슬비가 뿌려지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물어 어렵사리 바나웨이 행 밤차가 기다리고 있는 케이엠에스(KMS) 라이너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적지인 바나웨이까지 무려 10시간이 넘는 고행이 시작되었다. 좌석이 5열로 배치되어 비좁고 시트도 태반이 주저앉은 고물버스였다. 에어컨? 그건 상상만으로도 사치다.

2박3일의 바나웨이 여행 일정 동안 꼬박 이틀 밤을 고물버스 고물의자에 몸을 반으로 구겨 넣은 채 짐짝처럼 잠을 잤다. 아니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러나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잠자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고선 고문과도 같은 졸음과 피곤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여행 내내 고물버스와 트라이시클(삼륜 오토바이), 지프니에 몸을 실은 시간이 무려 37시간이나 되었다. 수중에 있는 여행경비라곤 고작 9만원 남짓이 전부였다. 궁하다 보니 필리핀 노동자들이 먹는 50페소짜리 밥을 사먹었고 그 돈도 아까워 한 달을 놔둬도 썩지않는다는 설이 있는 식빵을 45페소를 주고 사서 끼니를 때웠다. 나는 여차하면 거리에서 노숙할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우기 철에 필리핀 북부 산악지대를 여행하는 건 휘발유통을 짊어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을 정도로 무모한 짓이다. 폭우가 쏟아지면 도로는 유실되고 언제 산사태가 덮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날씨였다가도 어느 순간 폭우가 몰아친다. 발길 닿는 곳곳이 부비트랩이다.

그런데 왜 그 고생을 하면서 여행을 했느냐고? 글쎄,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곳에서 인간의 숭고한 생존의지와 생존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만을 지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떠돌이처럼 여행을 하면서 이 세상에서 소외받고 생존 터전에서 밀려난 수백만 수천만, 십수억 명의 떠돌이들의 고단한 삶이야말로 바로 인간의 역사라는 걸.

아, 서두가 정말 길었다. 이번 주에는 필리핀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시아, 네팔, 미얀마 등 아시아 전역을 걸으며 아시아 인민들의 삶과 투쟁의 역사를 기록한 유재현의 포토 다큐 에세이집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도서출판 그린비)를 소개한다. 이 책은 관광지의 풍경과 숙박 및 교통편을 소개하는 기존의 여행서들과는 전혀 다르다. 여행에서 풍광이란 껍질에 불과하다. 무릇 여행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란 풍광에 담겨 있는 속살, 바로 인간의 속살을 느끼는 것 아니겠는가?

/조혁신기자 choh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