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궁가 완창 연주한 시각장애인 고수 조경곤
   
▲ 조경곤 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고수'다. 지난 21일<수궁가>완창 고법발표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조 씨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장애인들의 희망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조 씨가 지난 18일 인천시 서구 검암동 자신의 집에서 판소리<수궁가>를 연주하고 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1고수, 2명창'이란 말이 있다. 고수가 으뜸이고 명창은 그 다음이란 뜻이다. '소년 명창은 있어도 소년 고수는 없다'는 얘기도 있다. 명창은 소년도 할 수 있으나 고수는 소년이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들은 모두 '고수', 즉 '북을 치는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한 얘기들이다. 조경곤(46) 씨. 그는 고수다. 그것도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다. 그가 지난 21일 인천서구문화회관에서 장장 3시간여에 이르는 판소리 <수궁가> 완창 고법 발표회를 가졌다.


"둥 둥 딱!" "얼~쑤!" "두둥, 두둥, 두두둥!" "허이! 조오~타!"

북소리는 소나기가 땅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관객들의 가슴을 강하게 쳤다.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지는 북소리와 추임새에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정선화 명창과 조경곤 고수의 소리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둘이 아닌 하나의 소리를 뿜어냈다. 공연이 끝났을 때 객석에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장애인, 비장애인을 떠나 지금까지 판소리를 완창 연주한 고수는 없었다.

웬만큼 북을 친다는 고수들조차 자신들이 잘 하는 부분만 발표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시각장애인인 조경곤 씨가 한 작품을 완창 연주하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고수는 손보다 눈이 좋아야 합니다. 명창의 입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처럼 고수가 명창과 공연을 할 때는 입을 잘 읽어야 협주가 가능하다. 명창들의 호흡과 감성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수는 명창의 입을 보며 박자와 강약을 조절해야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도 못 보는 그가 어떻게 고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무조건 연습만 했습니다. 그렇게 10년 쯤 하다 보니 마침내 명창의 입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던 그는 어느 순간 소리를 내는 명창의 입을 발견한다. 물론, 눈이 아닌 가슴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는 그렇게 무대에만 오르면 명창과 마주 앉아 소리를 주거니받거니 하며 마음으로 명창을 바라보았다.

"북을 치는 것은 연을 띄우는 것과 꼭 같습니다. 바람이 세면 연줄을 풀어주고, 바람이 약하면 줄을 감아주듯이 명창의 소리에 따라 완급을 잘 조절해야 하지요."

앞을 못 보는 그가 눈이 좋아야 가능한 고수가 된 이유는 자라난 환경의 영향이 컸다.

"전북 김제가 고향인데요. 어려서부터 아버지, 할아버지께서 판소리 하시는 것을 자주 들었어요. 시력을 점차 잃어가면서 자꾸 어린 시절의 판소리 가락이 귓전을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조 고수가 시력을 잃기 시작한 때는 운동을 하다 눈을 다친 고등학교 때부터이다. 이후 점차 빛을 잃어가던 그는 26살이 되던 지난 1992년 서울로 올라온다. 그리고 무작정 찾아간 곳이 국립국악원이었다. 당대 최고의 명고수였던 김청만 선생은 자신 앞에 바위처럼 앉아 북을 치고 싶다는 20대에게 걱정의 눈길을 보냈다.

"북을 잘 치려면 명창 입을 잘 봐야 한다. 수십년 간 북을 친 사람조차 명창 입을 보면서도 잘 못 하는데 너는 앞도 못 보면서 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 길을 가겠다는 것이냐."

"선생님 저를 거둬주신다면 제 온 몸을 바쳐 좋은 고수가 되겠습니다."

장애가 있음에도 굳이 고수를 하겠다는 20대 시각장애인을 스승은 기특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날 이후 조경곤은 밥 먹고 잠 자는 시간 외에는 절대 북채를 손에 놓치 않았다. 손가락이 찢어져 북과 북채에 피가 줄줄 흐르는 게 다반사였다.

"북을 치면서 열번도 넘게 포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북채를 놓고 나면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미련이 전신을 휘감곤 했지요. 포기하고 다시 시작하고, 포기하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 반복됐어요."

그렇게 10여 년. 2004년 그는 서울전국국악경연대회 명고부에 입상하며 당당히 '고수'란 명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이어 16회 팔마고수 전국경연대회 명고부 입상, 2009년 대한민국 목포 국악경연대회 명고부에 입상하면서 고수의 입지를 굳힌다.

점차 이름이 알려진 그는 안숙선, 김수연, 왕기철, 박양덕과 같은 명창들과 공연을 하는가 하면 TV에도 출연, 국악특강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번에 완창 연주를 하게 된 것이다.

"지난 20일이 장애인의 날이었잖아요? 저와 같은 처지인 장애인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고 싶었어요."

완창 연주를 이룬 고수가 되는 과정 말고도 그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며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발을 헛디뎌 지하철 레일에 떨어지는가 하면, 공사장 아래로 추락한 적도 있었다. 그 때마다 운 좋게 살아난 그는 '난 반드시 장애를 극복하고 우리나라 최고의 고수가 될 것'이라고 다짐했고 결국 그 꿈을 이뤘다.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의 한 축은 종교였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인천순복음교회 집사이기도 하다.

멋지게 완창 연주에 성공한 그가 새롭게 도전할 봉우리는 어느 지점일까.

"우선 인천무형문화재가 되기 위해 뛸 예정이구요, 미국이나 유럽에서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을 맘껏 보여주고 싶습니다. 북소리가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외국인들이 우리 가락을 듣고 감탄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에 있는 것이지요."

조 고수는 "북은 소우주이며 북소리에는 인간사 희로애락과 자연의 삼라만상이 모두 들어 있다"며 "서양음악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음악이라면 우리 음악은 사람을 살리는 음악"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를 하던 최정란 씨와 결혼, 슬하의 1남1녀와 함께 인천시 서구 검암동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