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하와이 이민 110주년'한인이민사 연구가 이덕희


 

   
▲ 1900년대 초 하와이'사진신랑'을 만나러 가기 전 신부들 모습.

하와이의 하늘 만큼이나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던, 지난 1일 오후 인천시립박물관 석남홀에선 '하와이 사진신부'란 주제의 역사강좌가 열렸다. 강사로 나온 이덕희(71) 하와이 한인이민사 연구가는 이날 강의를 위해 자신이 살고 있는 하와이를 출발,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하와이 사진신부'는 1902년 하와이로 첫 이민을 떠난 한인 남성들이 정착한 뒤 결혼을 위해 고국의 여성과 사진으로 선을 보고 결혼한 일을 말한다. 2012년 하와이 이민 110주년을 앞두고 고국을 찾은 이 씨를 만나 사진신부를 비롯, 하와이 이민사 얘기를 들어봤다. 그는 <하와이 이민 100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나?>의 저자이기도 하다.



"1910년 12월2일에 첫 사진신부가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했어요. 신랑은 사업가 이내수로 국민회 창설 회원이며 자유교회의 창립교인이기도 했지요. 민찬호 목사가 이민국에서 혼례식을 행했는데 이로부터 1924년 미국의 새 이민법으로 모든 동양인의 입국이 중단되기까지 약 800명의 한인이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그 중 680명이 사진신부였습니다."

사진신부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1902년 12월22일 제1진 121명을 비롯해 1905년 8월까지 하와이로 떠난 7천300명 가운데 일부였다.

"1905년 8월까지 7천300여 명의 사람들이 하와이로 이민왔고 한인의 이민은 끝을 맺게 됐습니다. 이 가운데는 640여 명의 부인과 550명의 어린 아이들이 포함돼 있었지요. 그러나 총각이나 홀아비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사진신부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와이 이민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공식으로 허가한 이민이었다. 고종 황제는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 20년 뒤인 1902년 11월5일 미국영토 하와이로의 이민을 허락한다. 고종은 1902년 11월16일 궁내부 지령90호로 궁내부에 속한 '수륜원'이란 기관을 확장하고 '유민원'이란 기구를 둔다. 유민원은 해외로 유학이나 유람을 가거나 농·공·상업과 관련해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여행권을 내주는 일을 맡았다. 해당 여행자들에 대한 단속규정을 엄격히 정하는 일을 관찰하도록 하기도 했다.

"유민원 총재였던 민영환은 12월부터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여권을 발급하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하와이 이민자들은 1902년 12월22일 제물포항에서 일본 상선 겐카이마루(玄海丸)를 타고 나카사키로 갑니다. 그리고 1월2일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지요."

이민행렬은 그러나 1905년 중단된다. 일본인의 하와이 이민을 관장하던 이민회사 간부였던 모리오카 마코토가 1904년 7월5일 '한인의 이민 때문에 일본인 이민에 피해가 간다'는 내용의 불평 서한을 일본외무성 자오간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일본외무성은 대한제국 정부에 하와이 이민을 중단하도록 강요한다.

이후 1924년 미국의 새 이민법으로 모든 동양인의 입국이 중단되기까지 약 800명의 한인이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그 중 680명이 사진신부였다.

"대한제국이 1910년 8월29일에 일본에 강점 당하면서 대한제국 국민은 일본의 속국인이 되었지요. 이후 한인들은 일본 여권을 갖고 미국에 와야 했습니다. 이 기간 하와이에 있던 남성들은 호놀룰루 소재 일본영사관에 신청해 받은 일본여권과 배삯을 한국으로 보냅니다. 간혹 서울 총독부에서 여권을 받고 온 이들도 있었지요."
 

   
▲ 재(在)하와이 한인이민사 연구가 이덕희 씨는 하와이 이민자들이 흘린 땀이 조국의 광복과 교육발전의 밑거름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1일 하와이 이민사의 편린인'사진신부'강연을 위해 인천시립박물관을 찾은 이덕희 씨가 하와이 이민사를 설명하고 있다./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일본여권을 가지고 도착한 새 신부들은 '여자가 없어' 결혼을 못하고 있던 남성들에게 신랑이란 선물을 안겨줬다. 게다가 이민이 중단된 후 10년 내지 20년 후에 온 사진신부들은 하와이의 신랑보다 적어도 10년은 젊기 일쑤였다. 신부아버지보다 더 늙은 신랑도 있었다.

"신부들은 진취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여성들이었고, 그 중엔 신식교육을 받은 사람도 많았어요. 당시 여자들을 위한 신식교육기관은 대부분 외국 선교사들이 운영한 학교였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경우도 많았지요. 사진신부들은 남편들과 다른 배경을 가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지요."

1914년 3월7일자 하와이에서 발행되는 신문 <국민보>는 1면 기사로 '합중국 중앙정부에서 사진혼인을 금지코저'란 제목의 기사를 싣는다.

이민국 총감 캐디네티가 상공부에 보고하면서 사진혼인을 금지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내용이었다.

요지는 사진혼인 중매자들이 '산아희(사나이)들을 하와이 은행가, 실업가, 대학생, 또는 애국지사'라고 속여 '적어도 학교 바람을 쏘이거나 예수교의 공기를 먹은 본국 여자들'과의 결혼을 주선하니 불행한 결혼이 된다는 얘기였다.

"남편될 사람을 소개할 때 국민회 회장 서기라거나 예수교회 권사니 조사 등의 직함을 빙자하며 감언이설로 꼬인다는 내용이 있었구요. 그래서 여자들이 고생 끝에 도착해 보면 중매자의 말이 다 거짓이며 신랑의 편지가 다 헛됨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지요."

사진신부들은 그러나 강한 집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를 악물고 가정을 꾸려나간 사진신부·신랑들의 후손들은 지금 하와이를 견인하는 막강한 한인사회로 성장한 것이다.

하와이 교민들은 사탕수수밭과 파인애플 농장에서 중노동을 하며 번 돈을 고국의 독립자금과 교육비로 보낸다. 그 결과 조국은 광복을 맞았고 인하대학교와 같은 명문사학이 탄생하게 된다.


"하와이 교민들이 보낸 15만 달러가 종자돈이 돼 설립한 학교가 인하공과대학교잖아요?(인하대학교란 이름은 인천의 '인'자와 하와이의 '하'자를 합해 만든 것이다.) 하와이교민들은 지금도 인하대학교에 큰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