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언론史 산증인 김상봉 선생
   
▲ 광복 이후 줄곧 인천에서 언론인 생활을 해온 김상봉 선생은"내 고장의 언론이 있어야 내 지역이 잘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지난 1일 부평구 산곡동에서 만난 김 선생이 경기매일신문의 폐간과 강제 통폐합, 인천언론 암흑기에 대한 회고를 하고 있다.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지난 8월31일은 대중일보의 후신인 '경기매일신문'이 '지령 9018호'를 끝으로 종간된 지 3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경기매일신문'은 1973년 8월 31일 박정희 군사정부의 '1도1사'란 언론탄압 정책으로 또 다른 인천의 신문이었던 '경기일보'와 함께 수원의 '연합신문'에 강제 합병된다. 이후 인천은 15년 간 언론의 불모지로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했다. 본보가 경기매일신문 폐간 38주년을 맞아 인천의 원로 언론인 김상봉(81) 선생을 만났다. 인천토박이인 그는 광복 이후 줄곧 인천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 '경기매일신문'1973년 8월31일자 종간호.'인천일보'로 다시 지역언론의 맥을 잇기 위해선 15년을 기다려야 했다.



"1973년 8월31일은 인천언론인으로서, 인천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치욕적이고 한 맺힌 날이었습니다."
원로 언론인 김상봉 선생에게 1973년 8월31일 인천경기지역 언론통폐합 당시 인천지역의 분위기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눈가 주변이 붉어졌다. 찰나적으로 침묵이 흘렀다. 입을 꾹 다문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얼굴을 들어 기자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천일보가 창간 23주년 기념호에 대중일보로 시작한 인천 언론의 역사를 기사화 했지요? 그 내용을 보고 왜 갑자기 내 고향 여우실(숭의동)이 떠올려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 선생은 인천일보 2011년 7월15일자 창간23주년 기획인 '인천일보와 인천언론사-해방 이후 정통언론 선도 … 인천·경기 최고(最古)신문' 기사를 본 뒤 가슴이 뭉클했다고 고백했다. 지나온 회한의 세월이 그의 뇌리를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1973년 8월31일에 (인천지역에 본사를 둔 신문은) 다 없어지고 수원으로 가지 않았어요? 그 뒤부터 인천은 언론의 암흑기를 보내야 했지요."
박정희 군부독재의 '1도1사 정책'에 따라 인천의 대표언론이던 '경기매일신문'은 수원에 본사를 둔 '연합신문'에 강제통폐합된다. 인천은 이후 15년 간 우리 고장 신문이 없는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군사정부는 인천에서 '7인위원회'라는 회의를 만들어 통폐합 결정을 내린 것처럼 가장했다.
"대학교수들 중심으로 7인위원회라는 걸 구성했다는데, 참여 명단에 들어있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7인위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군사정부가 유령위원회를 만들어 언론통폐합을 추진했다는 얘기다.
"자신들의 의지도 아니고 정부에 의해 강제통폐합된다는 사실은 언론인으로서도, 지역으로서도 수치스러운 일이었어요. 정부기관에 끌려가 갖은 협박과 회유 속 억지로 통폐합에 서명했던 경기매일신문 송수안 발행인조차 나중에 통폐합 무효선언을 했었지요. 우리는 신문(경기신문)불매운동을 벌였습니다."
1973년 인천에 연고를 둔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가 수원의 '연합신문'에 강제 합병하면서 인천에서 언론이 완전히 사라지자 인천사람들이 우려하던 일은 금세 발생했다.
"1974년 정월에 김양수 선생과 함께 석남 이경성 선생을 찾아갔어요. 매년 새해가 되면 세배를 드리러 갔었거든요. 그런데 그 날 따라 이경성 선생의 표정이 무척 쓸쓸한 겁니다. 한참 뒤에 입을 여셨는데 '올해가 우현선생 돌아가신 지 30주기야, 뭔가 하긴 해야하는데 인천에 신문 하나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 … '라고 말입니다."
이에 김상봉 선생은 "사업을 하시면 되지요"라고 말했다. 그의 머리 속에서 나름대로 스쳐가는 아이디어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랬어요. '그러잖아도 인천에 언론이 없어서 시민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우현선생 사업이 구심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하고 말씀드렸지요."
그게 시작이 돼 우현 동상 사업이 시작됐다. 인천에 언론이 없어 한맺힌 가슴으로 살던 인천사람들은 인천의 정체성을 밝히는 우현 사업에 적극 동참했다. 결국 그 해 6월27일, 우현 고유섭선생 동상 제막식이 열린다.
"사업은 성공했지만 인천에서 발행되는 신문이 없다보니 세상에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어요. 그 때 또한번 우리 고장 신문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지요."
인천에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난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그런 와중에 인천언론의 역할을 한 매체가 '인천상의보'였다.
"경기매일신문 부국장을 지내던 오종원 선생은 3사가 통폐합돼 수원에서 발행한 신문인 경기신문에 가지 않았어요. 그냥 실직자로 있다가 인천상공회의소 제안으로 그리로 들어갔지요. 거기서 인천상의보를 만들었지요."
인천상의보에서 역시 비판적인 기사는 쓸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 요원이 감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침묵의 15년이 흘렀다. 그리고 1988년 7월15일. 김 선생은 16면 짜리 신문 하나를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인천신문'(현 인천일보)이 창간호를 낸 것이다.
"촛불 하나 없던 암흑의 세계에 등불이 환하게 밝혀졌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는 "인천일보의 창간은 단순한 또하나의 지역언론의 탄생이 아니라 인천에 연고를 둔 대중일보의 부활이자, 경기매일신문의 부활이었다"며 "인천사람 모두가 드디어 내 고장 신문을 다시 찾게됐다며 펄쩍펄쩍 뛰었다"고 회고했다. 김 선생은 '인천의 언론'을 '인천의 정체성'으로 동일시 하고 있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인천일보 독자로 있다가 죽을겁니다. 내 고향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인천의 언론은 앞으로 내 고장에서 자라나는 젊은 세대에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정체성을 알고 자긍심을 갖게 하는 것이 인천 언론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새파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팔순 원로의 그윽한 미소 속으로 물기가 고이고 있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 김상봉 선생은 …

원로언론인 김상봉 선생은 조상대대로 550년 간 인천에서 살아온 집안(경주 김씨)의 16대 손이다. 그는 4형제의 막내로 위로 은하, 경하, 중하 세 형을 두고 있다. 이 중 김은하는 7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야당의원으로 원내총무를 거쳐 국회부의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인천언론계 1세대인 그는 인천숭의초등학교, 인천중학교, 동국대학교를 졸업했다. 1951년 '인천신보'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처음 시작한 그는 '동양통신', '인천공보', '주간인천', '경기매일신문', '인천일보' 등에서 근무했다.
1950년 한국전쟁, 1961년 5·16군사쿠데타, 1973년 언론통폐합 등 시대적 상황으로 중간중간 쉬기는 했지만 20대부터 80대에 이르는 지금까지도 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언론계 대부이다.
김상봉 선생의 고향 인천에 대한 애정은 여느 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다. 그는 인천사람임을 자랑으로 여기며 이를 주인의식으로 실천하고 있다. 지금은 건강상의 문제로 향토사학자로 활동하며 고향 인천을 위해 조용하지만 정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