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기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
   
▲ 지난달 31일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제52주기 추모제에서 김용기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묘비명조차 없는 죽산 묘를 가리키며 죽산의 사상과 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김 회장은 이번 8·15 광복절에 죽산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 1월20일 대법원이 52년만에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죽산 조봉암에게 무죄판결을 했지만 김용기(77·고려대 명예교수)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여전히 어깨가 무겁다. 대법원 재심 판결로 죽산의 무죄는 입증이 됐지만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생을 바쳤던 죽산의 삶이 '국가'로부터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8·15 광복절을 보름 여 앞둔 지난달 31일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열린 인천 출신 독립운동가 죽산 조봉암 제52주기 추모제에서 그를 만났다.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김용기 회장은 "죽산에 대한 사법살인은 우리 역사의 치부이자 민족의 수치"라며 "이제라도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부끄러운 과거사를 씻어 냈으니 남은 과제는 죽산의 삶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 것"이라고 밝혔다.
죽산이 법살된 지도 벌써 52년.
오래 전의 일인지라 진보당 관련 조직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김 회장은 진보당의 비공식 청년학생조직 '여명회'에서 조직부장을 지냈던 인연으로 기념사업회 조직 초기부터 깊숙이 관여했다. 2008년부터는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당시 나중에 고려대학교와 통합한 국학대학교 2학년 재학 중이었던 그는 죽산을 처음 만난 뒤 진보당과 인연을 맺게 된다.
김 회장은 "당시 죽산이 우리 젊은 대학생들과 토론을 했는데 그 탁월한 식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나도 자연스레 죽산과 진보당에 관심을 갖게 됐고 평생의 업이 됐다"고 밝혔다.
죽산의 공식 학력은 강화공립보통학교 졸업이 전부다. 현재로 따지면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죽산은 그러나 민족학교인 강화보창학교를 다닌 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기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실력을 쌓았다.
틈틈히 YMCA 중학부와 일본 쥬오대학,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등에서도 수학했다.
김 회장은 "죽산이 죽임을 당한 진보당사건 때 대학생들은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며 "미래 조국의 기둥인 대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진보당에서는 당원 가입을 아예 받지 않고 여명회 등으로 학습활동을 하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학재학 시절 죽산의 재판을 보며 성장했고 죽산이 법살된 1959년에 대학교를 졸업했다.
1971년부터 모교인 고려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1973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선포 때 2년,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또 다시 2년 각각 이스라엘과 캐나다로 망명아닌 망명을 다녀야 했다.
김 회장은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라며 "병마와 싸우면서도 기념사업회 회장 일을 맡게 된 것도 당시 부채의식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대법원 재심 무죄판결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 김용기 회장이 죽산 조봉암 선생 제52주기 추모제에서 죽산동상 건립을 추진 중인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왼쪽)과 성금 모금 및 동상 건립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죽산의 사상과 이상, 철학이 인천일보 기획연재 등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마치 죽산이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서 "몇 년 전 기념사업회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했을 때 인사말로 죽산의 사상이 부활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제 확실히 부활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죽산을 재조명하는 것이 현 시국에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52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에도 죽산이 가졌던 정치적 신념이 여전히 절실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죽산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는 민생과 인권, 평화통일이었다"라며 "죽산이 추진했던 토지개혁은 개인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해 자유시민이 되도록 한 정책이었고 인권신장을 진보당 강령에도 넣었다. 죽산이 남북 간의 군비경쟁을 반대하고 전쟁 없는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것도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불안한 시기에 귀감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진보당이 창당하면서 내건 5대 강령은 세계 평화와 인류 복지의 달성, 공산독재 및 자본가와 부패 분자의 독재 배격과 혁신정치 실현, 생산 분배의 합리적 계획을 통한 민족자본 육성과 농민 노동자 등의 생활권 확보,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 통일 실현, 교육체계의 국가보장제 수립 등이다.
죽산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200여만 표를 얻었지만 2위로 낙선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은 1958년 죽산에게 '북한과 내통해 정치자금을 받았다'며 간첩 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1심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으나 고등법원과 대법원은 유죄 판결했다. 대법원이 최종 판결을 내린 지 10시간 만인 1959년 7월 31일 죽산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야당이던 민주당도 이에 침묵으로 암묵적 동의했다.
김 회장은 "정권, 야당 할 것 없이 독선적인 사람들이 죽산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렇지만 죽산은 법에 순응하고 민주주의에 순응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인 선각자"라며 "이제야 죽산의 사상과 정신이 빛을 보는 것 같아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죽산의 '평화사상'에 관심이 높다.
김 회장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이 극에 달한 뒤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냉전을 거치면서 '평화'가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죽산이 직시했다"면서 "죽산의 사상은 단순히 통일에만 머물지 않고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라는 인류공통의 대의에 충실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복지국가론도 이 같은 배경에서 출발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인간본연의 가치추구, 즉 평화와 복지는 당시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영송가능한 개념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복지는 파라다이스, 기독교에서는 가나안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죽산은 이를 배부르고 등 따습고 평화롭게 사는 나라로 봤다"며 "이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죽산의 사상과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옛 원한을 풀고 서로 화해하는 길(해원상생)을 찾기 위해 그는 죽산의 정신을 기리는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일단 조호정 여사 등 유족들과 상의해 죽산의 신원까지 비워 둔 비문을 채워 나가고 죽산을 재조명하는 학술토론회와 강연회부터 시작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벌써 5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군사독재가 계속 되면서 진보당에서 일했던 분들 대부분이 유명을 달리 하셨다"며 "기념사업회가 기동력도 떨어지고 힘도 없지만 죽산이 뿌려놓은 씨앗을 후대에게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맡고 있다. 이제 그 역할은 인천시가, 그리고 정부가, 여야 정치권이, 학계 등 후대가 이어 가야 한다"고 밝혔다.
유족과 기념사업회는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열성적으로 추진 중인 죽산동상건립사업에 열정적인 지원과 함께 적극 참여하기로 했다.
추모제 당일에 모인 후원금과 성금 전액을 새얼문화재단에 기부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8·15 광복절에 죽산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 것에 전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김 회장은 "죽산이 뿌린 씨앗에 대해 이제 우리 사회가 묻고 대답해야 한다"며 "여태 공백으로 남겨운 죽산의 묘비 뒷면에 '평화통일과 온 국민이 잘사는 나라의 씨를 뿌리셨다'고 새길 수 있어야 진정한 조봉암의 시대적 복원이 완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글·사진 김칭우기자 chingw@itimes.co.kr



● 김용기 회장은 …

- 1934년 전북 익산 출생
- 국학대(고려대 통합 전), 성균관대 대학원 졸업
- 1971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1982년 전국 최초 한국정치사 강의 설강
- 2008년부터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
- 저서 <이스라엘 정치와 사회>, <정치학원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