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스크 칼럼 ▧


 

   
 

1980년대 초반 중학교에 입학한 까까머리 소년이 시골마을 수협을 찾아 정기적금 하나를 들었다. 중학생이 됐으니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자는 생각 뿐 거창한 계획 따윈 애당초 없었다. 3년 간 매달 660원을 불입한 뒤 원금과 이자를 타는 예금상품이었다. 이따금 생기는 푼돈을 모아가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하지 않겠냐는 심산이었다. 신문지에 돌돌 만 동전을 내밀면 한 동네 사는 누나이기도 한 수협 여행원이 동전을 센 뒤 "착실하구나"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달마다 불어나는 통장의 입금내역이 찍힌 인쇄향을 맡아보는 것도 남모를 즐거움이었다. 중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만기가 돼탄 적금은 원금 2만3천760원에 이자가 더해져 3만 원 가까운 제법 목돈(?)이었다.
몇몇 친구를 대동해 읍내에 나온 소년은 점심식사를 한턱 쏜 뒤 시장통에서 50원 짜리 플라스틱 머리빗 50여 개를 샀다. 투박한 종이를 얼키설키 가위로 오려내 낱개 포장한 머리빗을 같은 학급 동창생 모두에게 졸업선물로 나눠 줬다. 그래도 호주머니엔 몇 천 원쯤의 돈이 남아돌아 홀로 흐뭇해 할 수 있었다.
쑥스럽지만 여전히 또렷한 기자의 추억담이다.
농협중앙회의 금융전산망 장애 사태가 27일로 벌써 16일째다. 완전 복구는 지연되고 원인 규명을 위한 검찰 수사는 과연 언제쯤 명쾌한 결론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지 오리무중이다. 천하(?)의 농협중앙회 회장은 머리 숙여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농협은 고객들의 거래내역을 복구하지 못할 경우 손해를 보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각종 수수료 수입 손실, 현금 인출기록 부재로 인한 손실, 고객 이탈에 따른 손실 등이야 농협이 마땅히 떠안아야 할 책임이라 치자. 문제는 1천900만 명에 달하는 농협 고객의 거래내역 정보 가운데 아직 복구하지 못한 정보가 대체 얼마나 되는지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오죽하면 누리꾼들이 "14년 간 부부 사이였던 가수 서태지와 탤런트 이지아가 농협보다 훨씬 낫다. 농협도 이들의 보안력을 배워야 한다"고 냉소를 보내겠는가.
외부자 해킹, 내부자 공모 등 여러 가능성이 제기되고 금융기관의 보안 해이 현상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드높다.
현대캐피탈 해킹에서부터 농협 사태에 이르기까지 금융권 보안에 빨간불이 켜지자 국가기관은 물론 기업·단체마다 정보 보안의 중요성을 외치며 부산을 떠는 모양새다.
그런데 곰곰이 돌이켜 보면 전산망 장애로 우리 사회가 혼란을 겪었던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농협 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증권 전산망 마비(1992년), 우체국 온라인 마비(1993년), 옛 상업은행 및 증권 전산망 마비(1996년) 등이 반복됐었다. 급기야 일부에선 "금융 거래내역의 기본 데이터베이스(DB)는 물론이려니와 백업(Back-up) 시스템마저 영구보존을 기대키 어려운 만큼 오프라인 문서로 따로 보관토록 하는 규율 제정이 시급하다"고 지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자료의 전산입력이 빨리 진행된 관공서의 행정정보 역시 오프라인 상의 별도 보관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인 사용자만 1천만 명을 돌파한 스마트폰은 우리의 통화내용, 촬영장소, 개인일정, 문자메시지 심지어 이동경로까지 자신도 모르는 새 저장하고 있어 사생활 자유가 침범당할 여지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편해지려고 시간과 비용을 줄이려고 등의 명분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며 급속한 전산화를 꾀해 왔지만 정보기술(IT)의 한 치 빈틈은 순식간에 쓰나미가 돼 우리를 할퀴고 있다.
그렇다면 '최첨단'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 디지털 시대는 종말을 고해야 할까.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 한 켠에도 늘 아날로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꿈틀대고 있는 게 사실이어서 씁쓸할 따름이다.
인터넷뱅킹이 일반화된지 오래지만 현금입출금기에 통장을 찍어봐야 편안해지는 심리 말이다. 농협 전산망 사태는 스스로 던진 부메랑을 맞고 아파하는 우리 모두의 서글픈 자화상이 아닌가.
/윤관옥 경제부장